사람들은 뉴스를 믿는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인터뷰II> 마지막 문장을 리마인드 한다. "믿음이 있으면 설명이 불필요하고, 믿음이 없으면 설명이 불가능하다"(토마스 아퀴나스). 앵커에 대한 신뢰는 곧 뉴스에 대한 신뢰도와 비례한다. 최근 ‘앵커브리핑’, ‘앵커의 시선’ 등과 같은 형태의 앵커멘트가 확장하는 추세다. 뉴스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이같은 앵커 역할에 대한 호불호는 엇갈린다.
“that’s the way it is~”
뉴스 전달자로서의 앵커는 앵커멘트를 통해 진행자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전설적 앵커맨 월터 크롱카이트는 CBS 이브닝뉴스 크로징에서 항상 “that’s the way it is~”라는 멘트로 뉴스를 마무리했다. “그게 이렇지요~”하는 식인데, 크롱카이트의 메시지와 호흡하며 살았던 당시의 미국인들은 앵커가 전하는 말로 하루를 마감하며 “아, 그게 그런 것이구나~”하고 공감했을 것이다. 흔히 우리가 신문을 읽을 때 사실을 바탕으로 한 발생뉴스 뒷면에 담긴 의미를 사설이나 논설, 칼럼 등의 글을 통해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신문의 외부 기고나 칼럼 글 말미에는 "이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란 주석이 달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편집 방향'이 바로 해당 언론사의 제작 방침을 의미한다. 신문사의 논조는 바로 이 에디토리알을 통해 드러난다. 방송사 역시 에디토리알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BBC EDITORIAL GUIDELINES' 이다. (http://downloads.bbc.co.uk/guidelines/editorialguidelines/pdfs/bbc-editorial-guidelines-whole-document.pdf) BBC의 공적 가치 구현을 위해 프로그램을 어떻게 제작해야 하는가 하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방송뉴스에서 앵커멘트와 에디토리알은 어떻게 다른가? 방송뉴스의 앵커멘트는 신문의 사설과 논설 같은 에디토리알과 차이가 있다. 에디토리알이 해당 언론사의 입장과 견해를 보여주는 주장이라면, 앵커멘트는 뉴스의 키(앵커)를 잡는 객관적 내용의 전달이란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판단의 주체가 다르다. 에디토리알이 언론사의 판단이라면, 앵커멘트는 시청자의 판단을 돕는 것이다. 앵커의 판단이 아니다. 앵커의 주장이 아니다. 이 같은 앵커멘트의 특징이 최근 들어 변화하고 있다. 손석희 앵커가 진행한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은 변화하는 앵커멘트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2014년 9월22일에서부터 2019년 12월 31일까지 5년 3개월 동안 947회 전파를 탄 <앵커브리핑>은 우리나라 방송사에서 전무후무했던 새로운 저널리즘을 보여준 것이라는 호평과 함께 저널리즘의 영역이 아닌 주관적 논평이라는 비판이 교차했다.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20170523) 앵커브리핑을 보자. 길지만 모두 인용한다.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합니다.
이젠 세상에 없는 전직 대통령과 그의 오랜 친구는 김광석의 '친구'라는 노래를 사이에 두고 만났습니다.
또 다른 오래된 두 사람의 친구 역시 오늘(23일) 변호사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습니다.
뒷말을 울먹이며 흐릴 정도로 애틋한 관계였다지만 서로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던 어색한 해후였습니다.
같은 날 서로 다른 친구와 대면하게 되었던 전직 대통령들.
오늘의 한국 현대사는 마치 누군가 미리 모든 것을 설계해놓은 양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포개지며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가 감옥으로 내려가던 날 세월호는 뭍으로 올라왔고, 새 정부가 출발하는 날 귀가하지 못한 사람들은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정부가 4대 강을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리겠다 발표하던 날, 구명조끼를 입은 온전한 유해가 발견되었으며 전직 대통령의 서거 8주기를 맞은 날, 과거 그의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켰던 또 다른 탄핵된 대통령의 첫 재판이 열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정말 우연일까…
"지금 당장"
독일의 통일은 이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우연한 실수였습니다.
동독의 여당 관계자가 주민 여행 자유화 조치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동독 주민이 서독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던 것이죠.
언제부터냐고 묻는 기자들 질문에 당황한 그는 즉흥적으로 "지금 당장"이라고 대답했고 "베를린 장벽 무너지다" 라는 속보가 전 세계로 타전됨과 동시에 동독인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취급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E. H. 카의 말처럼 그것은 꾸준히 추진해왔던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자유와 통일을 향한 시민의 열망이 축적돼서 마치 우연과도 같은 필연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역사란 그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같은 날 서로 다른 장소에서 마주하게 된 오래된 친구들의 모습과 그 배가 올라오던 바로 그날, 하늘에 그림같이 걸려있던 리본 구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단순한 논리로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세상사를 두고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지요.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오늘의 뉴스인 전직 대통령 이슈를 과거의 이슈였던 베를린 장벽 붕괴와 병치시키고, 그 이슈를 끌고 가기 위해 대중가요를 삽입하는 문화적 코드, 그리고 E.H 카를 언급하는 촌철살인 성 ‘우연과 필연’... 메시지가 담고 있는 내용은 이성적이지만 그 내용을 풀어내는 방식은 다분히 감성적이다.
이 같은 앵커멘트가 저널리즘의 영역인가, 아닌가? 크로스 오버한 시대에 영역을 재단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앵커브리핑 식의 포맷이 시청자들에게 큰 관심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앵커브리핑> 이후 확산하고 있는 유사한 코너들이 이를 반증한다. 저널리즘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같은 형식의 앵커멘트는 손석희의 <앵커브리핑>이 시초가 아니다. 이미 전에도 이와 유사한 앵커멘트는 있어 왔다. 어느 특정 시점, 어느 특정인, 어느 특정 포맷이 얼마나 큰 울림과 공감을 얻어냈는가 하는 차이일 뿐이다. 나는 지난 2002년부터 2003년 YTN에서 <뉴스포커스>라는 타이틀로 밤 시간 대 뉴스를 진행한 바 있다. 20년 전이다. 뉴스를 마무리하며 1분 안팎의 크로징멘트를 하는 코너를 운영했다. 한 예를 들어 본다.
얼마 전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제목의 자극적인 영화가 있었지요. 그런데 이 같은 제목에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한 법률정보 사이트에서 네티즌이 가장 많이 조회한 법률 관련 용어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니까, 바로 ‘이혼’이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1,376만여 건의 검색어 조회 수 가운데 이혼이 1위였다는 것입니다. 서울시 한 구청 호적계에 근무하는 한 창구 직원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놀랍게도 혼인신고보다 이혼신고 접수가 더 많이 들어오는 날이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혹시 지금 컴퓨터 앞에 계십니까? 어떤 단어를 검색하고 계신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5WTR_MgUKjM&t=148s (40:40부터)
지금 보니 밋밋하다. 재미없다. 뭘 주장하자는 것인가? 나는 선배들로부터 배웠다. 앵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시청자들의 판단을 돕는 멘트를 하는 것이 앵커가 해야 할 일이라고 배웠다. 앵커는 선수가 아니다. 심판이다. 그것도 자신이 판결 내리는 심판이 아니라, 시청자들이 심판을 내릴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균형 감각을 잃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면서, 시청자가 판단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갓이다.
당시 16년 차 현장 취재기자 입장에서 밤 시간대 고정뉴스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클로징 멘트를 작성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그날의 이슈와 연관된 주제를 정한다.
둘째, 팩트에 근거해 멘트를 작성한다. 주관적 멘트 금지!
셋째, 구체적 수치 또는 인터뷰이를 통해 객관화한다.
넷째, 결론을 내리지 않고 시청자들의 판단을 구한다.
피터 드러커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상대가 무엇을 들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말이 평범한 개인이 아닌, 매스 미디어 진행자가 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앵커멘트를 통해 진행자의 입장과 견해를 전하는 것은 이제 새로운 방송 형식이 아니다. 내용도 다양해졌고, 시간도 늘었다. 중요한 것은 앵커의 입장은 팩트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저널리즘의 정신이다. <뉴스 룸>의 마지막 앵커브리핑과 <출발 새 아침>의 마지막 오프닝을 전문을 보자. 판단은 시청자의 몫이다.
[손석희 <뉴스룸> 마지막 앵커브리핑]
시청자 여러분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947회째를 맞는 올해 마지막 앵커브리핑은 또한 저의 마지막 브리핑이기도 합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있는 한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 < 떨리는 지남철 > 글씨와 그림 : 신영복, 자료 : 돌베개
그는 떨리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동그란 나침반 안에 들어 있는 지남철, 그 자석의 끝은 끊임없이 흔들리는데…
그 흔들림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방향을 찾아내기 위한 고뇌의 몸짓이라는 의미.
선배 세대가 남긴 살아감에 대한 통찰은 그러했습니다.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부패와 타락에 이르지만…
끊임없이 움직인다면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 역시 끊임없이 움직이며 방황하는 존재들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
삶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불안정한 것이니 흔들리고, 방황하며 실패할지라도 그는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사임 과정을 담은 영화 < 두 교황 >은 그 움직임의 생존적인 의미를 담아냅니다.
나이 든 교황이 건강 때문에 스마트 워치를 차고 생활하는데, 그가 한동안 움직이지 않을 경우에 어김없이 알람이 울립니다.
"멈추지 마세요. 계속 움직이세요"
- 영화 '두 교황'
그래야 비로소 살아있는 것이라는 그 냉정한 경고는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에게도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공히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수없이 올바른 목표점을 향해서 끊임없이 떨고 있는 그 나침반처럼 두려운 듯 떨리며 움직여온 우리의 2019년.
그리고 몇 시간 뒤 만나게 될 새로운 2020년 역시, 멈추지 않는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라며…
그 간의 앵커브리핑에서 가장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던 아일랜드 켈트족의 기도문을 보내드리는 것으로 뉴스룸의 < 앵커브리핑 >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항상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길…“
[김호성 <출발 새 아침> 마지막 오프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출발 새 아침 김호성입니다.
제가 '출발 새 아침'과 함께 출발한 지 꼭 446일째 되는 날입니다.
446,
딱 떨어지는 숫자 아니지요.
하지만, 제가 오늘을 끝으로 진행자에서 청취자로 돌아가는 그런 아침이기에
조금은 각별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정말 많은 뉴스가 있었습니다.
남북 정상과 북미 정상이 각각 서너 차례씩 만났습니다.
국회는 공전했고 여야는 대치했습니다.
소득주도성장,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열렸지만,
최저임금 1만 원 시대의 꿈은 접혔습니다.
억대 연봉 44만 명 통계 저편엔
기본급 165만 원 컨베어벨트에 끼인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도 있었습니다.
'지연된 정의'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법조계,
글로벌 시장을 장악한 BTS와 칸의 그랑프리 봉준호 감독,
세계 정상 코앞까지 진출한 청소년축구대표팀,
일왕의 퇴위와 우경화로 치닫는 아베 정권,
그리고 최초로 드러난 달의 뒷면,
명암과 희비가 교차했던 15개월이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방송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희망 고문'에 절망하는 이 시대에 여전히 꿈꿔야 할 가치를 전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때때로 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였습니다.
진행자로서 저는 항상,
제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늘 반대편의 입장에 주목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그럼에도 청취자 분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을 겁니다.
부족했기 때문에, 함께하려고 했습니다.
지난 446일,
이른 아침 함께 힘차게 출발해주신 청취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7월 19일, '김호성의 출발 새 아침' 진행 마지막 날,
금요일 아침입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나는 고발한다'의 작가 에밀 졸라는 "예술가는 자신의 존재를 개입시키지 않으면서 실제 세계의 모습을 제시해야 한다"는 이른바 '과학적 객관성'(siencetific objectivity)을 주창했다. 예술가의 역할이 이럴진대 하물며 저널리스트라면 설명이 필요 없다. 19세기에 나온 문제의식이다. 21세기 뉴 미디어 시대에 팩트를 기반으로 한 저널리즘의 가치에 어떤 교훈을 주는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태생적으로 방송저널리스트는 '익명에의 열정'(Passion for Anonymity) 속에서 살아가기 어렵다. 얼굴을 드러내놓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별이 빛날 수록 밤은 깊어 진다. 그렇기 때문에 가슴속 깊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유명인으로 영광을 누리고 싶으면 댄 래더가 될 필요가 없다. <트루스> 영화 속 댄 래더 역할을 한 로버트 레드포드가 되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