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언로. 닫힌 소통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크 루카치)
2021년 언론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필리핀 독립언론매체 래플러(Rappler)의 발행인 마리아 레사는 수상소감을 통해 이렇게 언급했다.
“소셜미디어는 더 위협적이다. 페이스북이 새 게이트키퍼가 되었다. 기존 언론 생태계를 파괴했다. 증오의 글들이 더 빨리 퍼진다. 여론이 양극화되고 진실은 찾을 수 없다.”
자유를 얻었으나 그 자유가 버거워진, 그래서 인간은 누군가 대신 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 줄 것을 기다려왔다. 그 역할을 신탁의 시대엔 '신'이, 또는 '신의 대리인이' 맡았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언론'이 그 역할자 중 하나로 등장했다. 다리를 놓는다는 뜻의 폰티펙스(Pontifex)가 교황이라면 미디어(Media)는 단어 그대로 중간에(Med) 위치해 극단을 연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언론을 갖고 있는가? '신의 시대'에 인간이 신을 믿었듯이 '인간의 시대'인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사람들은 뉴스를 신뢰하는가? 월터 크롱카이트가 경배했던 뉴스라는 이름의 신을 우리는 갖고 있는가?
뉴스는 종교가 아니다.
경배의 대상도 아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알기를 원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인간이 중심 되어 지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은 르네상스와 계몽의 시대를 거치면서 신들은 황혼으로 지고 인간은 새벽으로 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별을 보고 길을 찾던 시대의 향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가 옳은 길을 안내하지 못할 때, 또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때, 사람들은 길잡이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소피스트와 파워 유튜버
“피레네 산맥 이쪽에서의 정의는 저쪽에서의 불의다”라는 파스칼의 생각은 정의에 대한 신념을 독점할 수도, 해서도 안 된다는 표현에 다름 아니다. 신념은 강요가 아닌 자유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을 가질 권리, 표현의 자유, 저널리즘의 정신은 이렇게 퍼져나갔다.
특정 개인이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핍박받는다면 정의로운 공동체는 실현 불가능하다. '정의로운 공동체' 없이는 '행복한 개인'의 삶도 기대할 수 없다.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전체주의다.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없다.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는 “의회는 종교를 만들거나,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금지하거나,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그리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그 어떠한 법률도 만들 수 없다”라고 명문화하고 있다. 우리 헌법 역시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21조 1항)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의로운 사회는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사회다.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사상의 자유롭고 공개적인 시장’을 펼치는 것이 바로 언론의 사명이자 역할이다. 열린 언로의 옥석을 가리고 닫힌 소통의 숨통을 트는 일이 곧 '차이의 계곡'에 다리를 놓는 일이다. 그것이 곧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지키는 저널리즘의 사명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그 저널리즘의 사명에 기대기 전에 이미 스스로 권리를 얻었다. 누구나 다 미디어가 될 수 있는 1인 미디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내 의견을 언제, 어디서나 그것도 대단히 확장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가? 오히려 넘쳐나는 주장에 사회는 더욱 양극화되고 사회 공동체 구성원들은 편견과 선입견, 확증편향에 시달리고 있다는 진단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것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꽃 피기 시작할 당시 논리적 사고로 진실을 전해야 할 소피스트들이 공동체에 이바지하지 않고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궤변을 전하는 어용 지식인으로 전락한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는 오늘날의 파워 유투버였다. 하지만 소피스트 가운데에서도 절대진리의 도그마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회의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막힌 절벽이 아닌 열린 길을 닦았다. 터널을 뚫었고, 다리를 놓았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위해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할 언론의 중요성은 언로가 막혀있던 과거보다 언로가 무한대로 열려 있는 지금, 여기에서 더욱 커지고 있다.
저널리즘 정신
저널리즘은 지금 이 팩트가 진실인가애 대한 끊임없는 문제의식이다.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진실'(the best obtainable version of the truth)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뉴 미디어 시대에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짜뉴스'를 솎아내는 작업이다. 양극화가 극심한 상황에서 어느 한쪽 편 아닌 중간 지대의 확장성을 넓히고 진실에 이르는 험한 가시덩굴 길을 페이브먼트로 닦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저널리즘 정신이다.
6세기 초 서로마 말기의 철학자 보에티우스(475~535)는 이렇게 반문했다.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중에서)
'신의 시대' 아닌 '인간의 시대'에서 팩트를 찾고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은 '정의로운 공동체'에서 '행복한 개인'들을 위해 저널리스트가 해야 할 일이다. 태초에 스토리가 있었고, 그 스토리의 서사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듯이, 오늘날의 저널리스트가 팩트의 조각을 맞추는 메신저로서 역할을 다한다면 '차이의 계곡' 건너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 봉사하는 진실에 이르는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치는 유명세로 얻는 개인의 영광이 아닌 '익명에의 열정'(Passion for anonymity)으로 얻어지는 공동선이 될 것이다. 먼저 간 자에 대한 믿음이 길을 만든다.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열정이다. (토인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