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의 한 기억이 선명하다. 당시, 글쓰기 과제가 많았다. 일반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학원 뺑뺑이 속에서 하루를 끝내고, 밤 12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가곤 했다. 그때와는 다른, 자유롭고 능동적인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고등학교가 있다고 하여 그곳에 입학했는데, 그 덕분에 내가 원하던 새로운 경험들을 할 수 있었다.
15년이 훌쩍 지나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국어 시간의 과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배우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나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에서 일부 장면을 보고 듣고, 대본을 타이핑하며 직접 각색을 해보는 과제가 있었다. 그 후엔 팀을 이루어 짧은 영화 대본을 쓰고, 연기까지 해보는 활동도 있었다. 그 밖에도 격주마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일, 매주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을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은 내게 많은 의미를 남겼다.
그리고 어느 날, ‘여행’을 주제로 글을 쓰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당시, 나는 남동생과 같은 학교를 다녔고, 여러 사정으로 우리 둘은 연년생이었지만 같은 학년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과제를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우리 둘 다 언니, 나, 남동생, 여동생, 사남매가 함께 다녀온 홍콩 여행을 주제로 글을 썼다.
과제 평가 결과, 남동생은 A 플러스, 나는 B 마이너스를 받았다. ‘도대체 남동생은 어떻게 썼길래 글이 이렇게 달라?’하며 살짝 분하기도 했다. 똑같은 코스로 여행을 하고,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함께 다니고, 같은 주제로 글을 썼는데, 어떻게 결과가 다를 수 있을까 의아했다.
그러나 남동생의 글을 보니 바로 납득이 됐고, 심지어 내 글이 부끄럽기도 했다. 요약하면, 내 글은 그저 여행 일정을 나열하고, 남매들 간의 에피소드에 대한 간단한 감상에 그쳤다. ‘3박 4일간의 여행 계획을 짜고, 사남매가 함께 잘 다닐 수 있도록 중간역할을 하느라 힘들었다. 그렇지만 여행 가이드의 역할을 해볼 수 있어 보람찼고, 좋은 추억을 함께해 준 남매들 고맙다. 끝.’이었다.
반면, 남동생의 글은 달랐다. 홍콩에서 본 건물 양식에서 느낀 특이함, 그 나라 사람들과 다양한 인종들, 과거 역사로 인해 주로 사용되는 언어에 대한 생각, 홍콩에서 먹었던 음식에 대한 감상과 고민까지 담겨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먹고, 경험했다고 해도, 사람마다 느끼고 흡수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같은 홍콩의 거리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지만, 그때의 느낌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감상이 저급하고, 남동생의 감상만 고급이라는 자학은 아니다. 또 그렇다고, 내 감상이 부끄러운 건 아니다. 그것도 내 진심이었고, 내 방식대로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점수를 주자면, 남동생의 글이 홍콩이라는 장소에서 느낀 생각들을 진지하게 풀어냈기에 나 역시 그에게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홍콩이 아니어도, 다른 장소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가을, 나는 유럽 3개국, 5개 도시를 여행하면서 그 나라들을 충분히 느껴보기로 결심했다. 포르투갈 리스본, 포르투, 스페인 바르셀로나, 프랑스 니스, 파리. 그 나라들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남길지, 무엇을 느끼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곳에서, 그저 여행이 아니라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무엇을 담고 올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