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틈새, 생명의 자리

엄마의 골목 텃밭 이야기

by 진주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비탈진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가면, 끝자락에 전봇대 하나가 묵묵히 서 있다. 그 곁의 대추나무는 단 한 알의 열매도 맺지 못했지만, 자잘한 잎사귀를 바람에 흔들며 조용히 제 몫의 생을 이어가고 있다. 그 아래, 대파며 콩, 들깨, 고구마 넝쿨이 삐걱대는 틈새 땅을 비집고 나와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다. 손때 묻은 삽자루가 보이지 않아도, 그 땅에는 누군가의 땀과 마음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농사라곤 전혀 모르는 나조차, 그 풍경 앞에선 한참을 멈춰 선다.

 해바라기와 채송화가 그 식물들 곁을 포근히 감싸며 피어 있고, 울타리도 담장도 없는 그곳은 이름 없는 정원의 테두리처럼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던, 집 짓고 남은 자투리 땅이 이제는 도시의 가장 낮은 자리에 피어난 생명의 자리가 되었다. 전봇대 옆 모퉁이땅은 한때 페트병과 우유갑, 썩은 냄새 밴 비닐봉지들로 뒤덮여 몸살을 앓았다.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라는 팻말은 늘 무력했다. 한 사람이 무심코 던진 종이 한 장이 또 다른 이의 외면을 불렀고, 그 땅은 누구에게도 돌봄 받지 못한 채 조용히 잊혀 가고 있었다.

 엄마는 평소 아랫집 계단이며 골목길 청소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결국 그날, 모퉁이에 쌓인 쓰레기더미에도 손을 대셨다. 동생도 팔을 걷어붙였다. 집에서 키우던 들꽃을 옮겨 심고, 가을에 받아둔 꽃씨를 조심스레 흩뿌렸다. 척박한 땅엔 영양제를 섞은 흙을 덮고, 병충해 방지약도 골고루 뿌렸다. 그렇게 회색빛 시멘트 골목 한가운데에 국화, 칸나, 봉선화, 코스모스, 금잔화가 계절을 따라 피어나기 시작했다. 메마른 공간에서 생명이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옥상 화분에서 농작물을 키우시던 엄마는 이제 그 모퉁이 땅에 마음을 주셨다.

 어느새 엄마와 동생은 마치 그 땅이 자기 것인 양 다투기 시작했고, 결국 동생이 한발 물러섰다. 가운데는 계절 작물을 심고, 가장자리는 꽃밭으로 남기기로 하면서 조용한 타협이 이루어졌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던 자투리땅, 악취로 외면받던 그 자리엔 어느새 햇살 머무는 작은 텃밭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세입자가 얼굴을 붉히며 다가왔다. “누가, 꽃을 심으라고 했습니까? 화분도 치우시고, 작물도 언젠간 다 뽑아버릴 겁니다.” 엄마는 물러서지 않으셨다. “쓰레기 한 번이라도 치워본 적 있으세요?” “지저분한 골목보다 더 낫지 않나요?” “그게 싫으시면, 본인이 한번 가꿔보시든지요.” 남자는 조용히 돌아섰다. 짧은 다툼은 끝났지만, 그의 눈빛 어딘가엔 묘한 흔들림이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엄마는 말수가 줄었다. 가을에 심을 마늘밭이 머릿속에 떠오르셨는지, 이유 없이 짜증도 내셨다. 말은 없었지만,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 그 사이, 골목은 조금씩 달라졌다. 누군가는 빈 페트병을 다시 주워 갔다. 옆집 할머니는 텃밭 옆 공터에 돗자리를 펴고 빨갛게 익은 고추를 말렸다. 빨갛게 번진 햇볕 속에서 고추 냄새가 은근히 골목 끝까지 퍼졌다. 사흘째 되던 날, 그 남자가 다시 지나갔다. 엄마는 흙을 고르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 곁을 스쳐 지나갔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발걸음 소리만이 좁은 골목에 길게 남았다.

 비록 법적으로는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땅이지만, 그곳을 가장 먼저 품은 건 엄마의 손이었다. 쓰레기가 사라지고, 꽃이 피었고, 도시 한복판에서 나비와 잠자리가 날았다. 눈앞의 편리와 이익만 좇는 사람들 틈에서, 한 사람의 손이 만든 작은 기적이었다. 나는 그 생명의 기운이 이웃들에게도 더 멀리 스며들기를 바란다. 엄마가 정성껏 돌보는 꽃과 작물처럼, 엄마의 하루하루도 늘 봄날이었으면 한다. 언젠가, 향긋한 꽃내음이 그 남자의 마음에도 머물기를.

 며칠째 이어지는 장맛비 속에서도 호랑이콩 넝쿨은 무성히 자라고 있다. 마치 엄마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오늘도 빗방울을 머금은 잎이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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