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하던 날, 삔치기 훈장을 달고

타이어 슬리퍼 선생님과 사루비아 꽃의 기억

by 진주

“진주야, 오늘 왜 늦잠이야! 지각이야!”

엄마의 목소리에 부리나케 일어났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학교로 달렸다. 길엔 학생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닫힌 교문을 보는 순간,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같은 담임 얼굴이 떠올랐다. 사냥꾼 앞의 토끼처럼 달려가 교문을 세차게 흔들었다.

5학년 담임은 ‘타이어 슬리퍼의 달인’이었다. 평소엔 멋지고 잘생겨 옆 반 여학생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화가 나면 책상 위로 올라가 슬리퍼를 던졌다. 타이어로 만든 묵직한 슬리퍼는 공기 저항마저 계산한 듯 ‘딱!’ 소리와 함께 표적에 꽂혔다. 교실 안 어디든 4미터 이내는 백발백중이었다. 그 놀라운 정확도는 반 친구들의 공식처럼 굳어 있었다.

우리 반엔 ‘곰발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 피부병으로 머리에 딱지가 늘 있었고, 보자기를 쓰고 다녔다. 전당포집 딸이라는 말이 돌았고, 등교는 늦고 하교는 빨랐다. 쉬는 시간에도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선생님이 가장 자주 슬리퍼를 날린 대상이 그녀였다. 허공을 가르는 슬리퍼에도 묵묵히 보자기를 고쳐 쓰던 모습, 이름은 잊었어도 그 보자기만은 뚜렷하다.

나는 ‘삔따먹기 왕’이었다. 책상 끝에 동그라미와 직선을 그리고 손가락으로 삔을 튕겨 상대 삔을 동그라미 안에 넣으면 가져가는 게임이었다. 내 삔이 책상 밖으로 튕겨 나가면 상대방이 가져간다. 더 어렵게 하려고 책상을 이어 붙였다. 거리 감각이 좋아 삔을 동그라미에 정확히 꽂았다. 딴 삔을 옷핀에 주렁주렁 2줄로 끼워 앞 옷가슴에 달고 다녔다. 걸을 때마다 묵직한 삔 훈장이 출렁거렸다. 그 시절, 그 훈장은 5학년 여학생들에게 작은 권력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교실은 삔 부딪히는 소리와 환호로 가득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찌나 우스운지, 그깟 삔 따먹기 훈장이 뭐라고 그렇게 목숨을 걸었을까 싶다.

우리 교실은 1층이었다. 뒷문을 열면 운동장과 맞닿은 길가에 사루비아 꽃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붉은 꽃잎은 한여름 햇볕 속에서 태양보다 진하게 빛났다. 아이들은 꽃잎을 따서 입에 물고 꿀을 빨았다. 단맛은 거의 없었지만, 그 여름만큼은 달콤했다. 사루비아는 내 어린 날을 붉게 물들인 꽃이다.

담임 댁이 가까워 자주 심부름을 갔다. 서류와 봉투를 전하고, 반찬통을 들고 갔다. 말은 없었지만, 은근한 관심과 애정이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슬리퍼는 무서웠지만 선생님이 밉지 않았다.

그날, 엄마의 외침에 놀라 교문 앞까지 달려갔으나 학교는 고요했다. 수위 아저씨가 묻자 “지각했어요… 문 열어주세요”라고 답했다. 돌아온 말은 “얘야, 다 하교했어. 오후야.”였다. 엄마에게 속았다는 생각보다 지각이 아니라는 안도감이 앞섰다. 곰발쟁이도, 날아오는 슬리퍼도 없었고, 해는 덕림산 너머로 기울어 있었다. 나른한 오후, 낮잠이 몰려오면 타이어 슬리퍼 선생님도, 삔치기 훈장도, 보자기 친구와 사루비아 꽃도 꿈속에서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그 낮잠은 그 시절 우리를 다시 그 교실로 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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