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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도피하다 09화

도피 9

코모레비(木漏れ日)

by 도피

사실 영화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다. 제법 많은 OTT를 구독하고 있지만 늘 보는 건 정해져 있다. 매주 나오는 예능 프로 혹은 반복해서 보는 시트콤 정도. 누구에게 추천을 받은 영화나 관심 있던 주제의 영화를 알게 되어도 재생 창 앞에서 늘 망설이곤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까닭은 아마 '몰입의 정도'일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한 영화를 보면 적어도 1달간은 푹 몰입해서 살았다. 사촌들과 봤던 '배트맨 다크나이트'. 히스 레저의 조커 연기는 아직까지도 큰 충격으로 남아있다. 사촌들은 긴 러닝타임에 지쳐 잠에 들었지만 난 그리 크지도 않은 눈을 부릅뜨고 조커의 연기를 바라보았다. 히스 레저의 조커는 아직까지도 큰 충격으로 남아있다. 이후 집에 돌아가 엄마에게 조커 분장을 해달라며 졸랐다. 엄마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립스틱을 볼에 짙게 칠해주셨다.


'벼랑 위의 포뇨'를 보고 모아 놓은 용돈을 탈탈 털어 인형을 사고 동생에게 하루 종일 영화 주제가를 알려 주었던 일,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집에 오는 길에 바로 농구공을 구매했던 일 등등 많은 몰입의 일화들이 있다.


이와 같이 나의 몰입의 정도는 깊고 과하다. 그렇기에 감정을 툭툭 건드리는 영화는 본능적으로 피하고 시트콤이나 예능을 찾는 인간이 되어 버린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영화를 자주 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영화에 대한 추천은 계속해서 받아놓곤 한다. 언제 몰입의 환경이 나에게 허락될지 모르니 말이다. 얼마 전 몰입의 환경을 갑자기 맞이한 적이 있다. 이때 이따금 추천받았던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를 보았다. 꽤 담백했고 짙었던 영화였다. 잔상이 제법 오래 남았으며 '나의 완벽한 하루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들었던 영화였다.


이 영화 덕에 코모레비(木漏れ日)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코모레비란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일본어다. 주인공이 매일 같은 곳에서 같은 나무를 보며 매일 다른 코모레비를 작은 카메라에 담는 행위는 숭고해 보였다.


코모레비가 내려와 땅을 일굴 때의 표정. 그것을 담는 행위. 그 아래 숨 쉬는 생명. 모든 것들이 이루어져 하나의 도피처를 만들어낸다.


'코모레비는 바로 그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온 말이다.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우리들이 삶에 깊게 몰입하며 관용을 머금은 코모레비가 되길. 반짝!


무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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