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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Sep 07. 2022

꽃과 함께 말린 기억

꽃갈피


일주일 전에 데려온 라넌큘러스 하노이가 그새 모든 꽃잎을 다 피워내고 이제 한 두장씩 떨궈내고 있다.

작약과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넌큘러스는 얇고 하늘하늘한 꽃잎이 겹겹이 쌓여있는 아름다운 꽃이다. 모든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때쯤이면 마치 웨딩드레스같이 곱고 우아하다. 처음 이 꽃의 이름을 모르고 꽃집에 가서 다짜고짜 풍성한 웨딩드레스같이 생긴 꽃 있냐고 여쭤봤던 기억이 난다.

꽃을 들인 날은 유독 기분이 더 좋다. 내가 좋아하는 갈색 화병에 꽃아 식탁 위에 놓아두면 아침밥도 맛있고 기운이 난다. 은은한 향까지 풍긴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꽃을 사 올 때 굳이 코를 쓰지 않는 걸 보면 시각적으로 보이는 꽃의 예쁜 생김을 좋아하는 것 같다.

꽃 하나로도 집안 분위기가 달라지고 꽃이 있다면 왠지 청소를 더 열심히 하게 된다. 하다못해 화병을 놓아둔 테이블만이라도 깔끔하게 싹 정리한다. 그래야 예쁜 꽃이 더 돋보이기 때문이다.

꽃덕분에 기분이 좋은 건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아이들도 아침에 눈을 뜨면 꽃을 관찰하러 쪼르르 달려간다.

어제는 막둥이가 흐드러지게 핀 라넌큘러스 자태에 감탄하며 향기를 맡겠다고 코를 파묻다시피 갖다 대었더니 꽃잎이 그만 후드득 떨어지고 말았다. 그걸 보고 언니가 너 때문이라고 따끔하게 혼내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시무룩해진 아이와 성이 난 아이를 달래며 이제 꽃잎이 떨어질 때가 되어서 그런 거라고 얘기해줬더니 글쎄, 떨어진 꽃잎 몇 장을 주워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펼쳐 살포시 넣어두는 거다.

"엄마, 우리 이거 나중에 열어보자" 하면서. 틀림없는 내 딸이 맞는구나 싶어서 또 한 번 웃음이 나왔다.


온통 꽃과 나무에 둘러싸여 살던 어린 시절, 그 모든 것은 나의 놀이터가 되어 주었다.

집 주변에 과실나무가 참 많았는데 과일이 달리기 전에 피어나는 저마다의 꽃이 있다. 크기도 생김도 모두 다른 예쁜 그 꽃들을 얼마 후면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꽃을 따다가 책 사이에 꽂아두곤 했는데 그러면 열매를 볼 수 없다고 엄마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이건 나도 엄마에게 배운 거다.

엄마 뒤를 따라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 동네 한 바퀴 산책을 할 때면 엄마는 아주 작은 풀꽃에도 눈길을 주었다.

"아~ 미야 이것 좀 봐라. 예쁘제"

이건 냉이꽃이고 이건 클로버, 이건 취꽃, 이건 민들레, 또 이건 씀바귀, 이건 채송화, 이름 모를 야생화들까지.

엄마는 그 계절에 절로 피어난 것들에 감탄을 하며 하나씩 꺾어다 손에 쥐어 줬다. 그러면 그것들을 놓칠세라 고사리손에 땀이 찰 만큼 꽉 쥐어가며 종종걸음으로 집에 도착하고 보면 줄기들은 모두 뭉개지고 없었다.

엄마는 내 손아귀에서 간신이 살아남은 얼굴들만 톡 떼어다가 아무도 보지 않는 두꺼운 백과사전 사이에 꽂아 두었다. 아무 꽃이나 꺾으면 안 된다는 당부와 함께.

그게 나에게는 재미있고 새로운 기억이었던 건지 그 이후로 아무거나 뜯어다가 엄마를 흉내 내곤 했는데 그 대상은 비단 꽃뿐만이 아니었다.

통통한 돌나물도, 두껍고 빳빳한 감나무잎도, 동그란 달래 뿌리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은 모조리 책에 갖다 꽂았고 그런 수분이 많은 것들은 책을 엉망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비싼 책을 못쓰게 만들어놨다고 내 앞에서는 뭘 하지를 못한다며 혀를 끌끌 차는 엄마에겐 비록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어차피 아무도 보지 않는 책인데 뭘 그러실까.

그 이후로도 나는 쭉 그랬다. 길을 걸을 때면 주변을 살피느라 늘 바쁘고 맘에 드는 풀꽃이나 나뭇잎들이 있으면 가져다가 책에 꽂아 잘 말려두었다.

한창 감성이 풍부했던 중학교 때는 예쁘게 잘 마른 것들을 손코팅지로 정성껏 코팅도 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책갈피를 만들어 그 위에 네임펜으로 편지를 써서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주의할 점은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만 줘야 한다는 거다. 한 번은 너무 예쁘게 말라서 아끼고 아끼던 것을 친구에게 준 적이 있었는데 픽- 하는 코웃음과 함께 떨떠름한 그 표정에 주고도 미안하고 아까워서 속상했던 적도 있으니까.


지금 우리 집 책꽂이 젤 위칸에는 내가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시집 4권이 있다. 얇은 그 시집들은 언제 꽂아둔 건지도 모를 꽃과 이파리들로 뚱뚱해졌다. 하얗던 종잇장들은 꽃물이 들어버린 탓에 거뭇해져 보기 싫게 되었지만 옛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펼쳐 본 시집은 단순한 책이 아니었다.

한때는 흐르는 시간 속에 모습이 달라져 버릴 그 계절이 아쉬워서 오래도록 지금을 기억하는 나만의 방법이었던 꽃갈피가, 지금의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저 책장을 넘겨보았을 뿐인데, 존재나 했었을까 싶을 만큼 까맣게 잊고 지냈던 나의 지난 세월과 추억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튀어나오는 꽃갈피를 보며 '뭐 이런 것까지 꽂아뒀나, 참 나도 나다' 싶어 피식 웃음이 나지만, 오랜 시간을 지나 온 그 시절의 마른 꽃잎을 보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의 나를 만나고 온 것 같아 주책맞게 설레고 말았다. 긁을 수도 없는 심장이 마구 간질간질거린다. 그 시절이 아련해진다. 이미 다 부서져 가루가 되어버린 꽃잎은 더 그렇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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