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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Sep 06. 2022

기쁘고 벅찬 보통날

나도 생일이 생겼어

  내가 크는 동안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내 생일을 챙긴 적이 없었다.

  엄마는 1년에 딱 한 번, 아빠의 생신만은 꼭 챙겼다.

  미역국에 잡채에 고기반찬도 하고, 케이크 구경은 못해본 것 같지만 맛있는 저녁밥상이 기다리고 있던 나름대로 근사한 날이었다. 늘 그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 그날은 예쁜 생크림 케이크 대신 롤케이크를 먹었던 생각이 난다.

  어렸을 때 나의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먹었다거나 파티를 했다거나 하는 기억은 없다. 아무리 아무리 기억을 짜내어봐도 정말 없다. 어떻게 그 정도로 없을 수 있나 싶은데 비록 파티는 아니지만 딱 한 가지 나의 생일날과 연결되는 일이 하나 있긴 하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내가 7살이었던 것 같다. 그날 이모와 사촌 여동생이 우리 집에 놀러를 왔고, 나는 빨간 새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모가 그날 사 온 것인지, 이모가 오기 전부터 입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처음 입은 바지인 건 맞다. 빨간 코듀로이 바지로 허리에 같은 재질의 작은 가방이 달려있는 예쁜 바지였다. 새 바지를 입은 만큼 당연히 7살 아이의 기분도 날아갈 만큼 좋았다.

  동생들과 놀던 중 사촌 여동생이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했다. 그때 우리 집은 재래식 화장실로 겨우 7살이던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서는 그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지 못했다. 엄마가 안아서 화장실에 앉혀주거나 언니들이 잡아주면 몰라도. 그래서 화장실로 가는 계단 옆쪽에 거름을 쌓아두던 곳에서 주로 볼일을 봤다. 그러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기 시작한 지 하루 이틀쯤 되었을까.

  동생 앞에서 언니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 이제 화장실에서 혼자 볼일을 볼 수 있다고 자신했다. 마침 동생도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하고 나의 달라진 모습도 보여줄 겸 우리끼리 화장실을 갔다. 동생이 거름 앞에서 볼일을 다 볼 때까지 기다려주었다가 화장실로 데리고 올라갔다. 호기롭게 빨간 바지를 내리고 보란 듯이 다리를 벌려 앉았다...... 고 생각했는데!

  무얼 잘못한 건지 화장실에 빠지고 말았다.

  그 후로 나는 기억이 없다. 내가 빠지자 놀란 동생이 소리를 지르며 엄마를 불렀고 급하게 달려온 엄마가 배설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의 손을 잡아끌어올렸다고 한다.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한다. 개인의 상상력에 맡기겠다.

  아무튼 그렇게 정신을 차려 깨어났을 때 나는 깨끗한 몸으로 포근한 이불속에 있었다. 잠에서 덜 깬 듯 몽롱한 정신에 내 귀에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죽지 않고 살아난 게 기적이지. 조금만 늦게 갔어도 큰일 날뻔했다, 진짜. 그것도 생일날에."




  새 친구를 사귀면 꼭 물어오는 게 있었다. 나의 생일.

  친구들은 나의 생일을 그렇게 궁금해했다.

  친한 친구 사이라면 서로의 생일을 당연히 알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물음 자체가 쉽게 입 밖으로 나와지지 않았다. 나의 생일을 챙긴 적이 없으니 생일이 중요한 날이라는 생각 자체를 못한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정확한 나의 생일 날짜도 모르고 있었다. 등본에 적혀있던 나의 출생신고 날짜, 나의 주민등록번호에 있는 날짜가 생일이라고 생각해서 친구들이 물으면 11월 6일이라고 말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진짜 태어난 날이 궁금해졌다. 엄마에게 여쭤봤지만 음력 날짜만 기억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음력 8월 21일이 나의 생일이 되었다. 하지만 매년 바뀌는 날짜에 내가 헷갈려서 다시 11월 6일을 생일로 하자고 결정했다.

 

  그날은 바람이 조금 찼던 걸로 기억한다.

  붉은색 교복 치마 안에 보라색 학교 체육복 바지까지 겹쳐 입고 등교를 했다. 당시 유행하던 패션이었다.

  11월 6일, 나의 생일이었지만 생일이 아니었다. 별생각 없이 평소와 다름없는 등굣길이었다. 어쩐 일인지 교문 앞에 두 명의 반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수다를 떨며 교실로 향했다. 교실이 가까워지자 한 친구는 재빨리 교실로 뛰어 들어갔고 내가 교실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노랫소리가 들렸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선미의 생일 축하합니다~"

  반 친구들 모두가 입을 맞춰 나를 위해 불러주는 생일 축하곡이었다. 그리고 교탁 위에 놓인 예쁜 생크림 케이크에는 초가 타고 있었다. 그 모든 걸 준비한 나의 친구 현정이는 꽃다발을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축하를 받은 것도, 생일이라고 꽃다발을 받은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첫 생일파티였다.

  거울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그때 나의 두 귀와 얼굴은 벌겋게 불타오르고 있었을 거다. 그 순간에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턱이 덜덜 떨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생일'이라는 날이 이렇게 부끄럽고 기쁘고 벅찬 날이구나.

  너무 고마웠다. 집에서도 챙기지 않는 생일이었다. 심지어 진짜 생일도 아니었다. 나 조차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그냥 보통날 가운데 하루였을 뿐이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심장이 두근거렸다. 계속 웃음이 났다.

  평소 친하지 않던 반 친구들도 왠지 나에게 다정한 것 같았다. 생일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축하를 받으니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도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싶어 이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제는 나의 진짜 생일을 알아야 했다. 진짜 나의 날이 갖고 싶어졌다.

  언젠가 인터넷으로 내가 태어난 그 해의 달력을 찾아보았다. 음력 8월 21일은 양력 9월 27일이라고 했다.

  날짜도 날씨도 딱 마음에 드는 특별한 날을 만났다.

  그때부터 나의 생일은 9월 27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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