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단지 조금 웃고싶었을 뿐이야

by 파란동화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강원도 고성에 있었다. 등에는 배낭이 있었고 그 안에는 텐트와 침낭도 들어있었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것은 '백두대간 등산지도' 였다.



천만 원이라는 돈은 모으려면 쌔가 빠지지만 작정하고 쓰자고 들면 하룻밤 만에도 사라져 버리는 푼돈이었다. 처음에는 그 하나의 돈으로 해외여행을 가려고 했다. 서른이 넘기까지 해외여행은 가본 적이 없었기에 생의 마지막을 다른 나라에서 장식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가가 저렴한 싸구려 해외를 돌고 돌다가 마지막에는 사막 횡단을 해야지. 그러고는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리는 거야! 그래, 그게 좋겠어.



마음은 먹었지만 여권을 마련하고 비자를 신청하고 항공권을 예약하는 그런 기본적인 것부터가 무척이나 귀찮게만 느껴졌다.



가출을 하기 몇 달 전부터, 그리고 가출에서 돌아온 이후로도 나의 일상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으므로.



매일이 불면의 연속이었고 그러니 매일 술만 마셨고 거의 항상 오후가 되어야 잠에서 깨어났으며, 어떤 날은 잠에서 깨자마자 라면을 끓여 또 술을 마셨다.



내가 외출을 할 때는 술을 사러 나갈 때뿐이었다. 어쩌다가 술을 사러 나갔다가 집 앞 중랑천을 걷기도 했지만 엉망인 일상에 몸뚱이도 엉망이 되어 잠깐 걷는 것도 숨이 차고 힘에 부쳤다.



그러다가 오빠의 낡은 코펠을 빌려 지리산을 간 것은 그저 잠깐이라도 웃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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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대학생일 때, 오빠가 사촌들을 모두 끌고 지리산 종주를 감행한 적이 있었다. 종주를 하려다가 퍼져버린 사촌 덕분에 중간지점에서 하산을 했는데, 길을 잘못 든 바람에 등산로 정비가 되지 않은 계곡을 끼고 어렵게 어렵게 산을 내려온 기억.



사촌 중 어떤 녀석은 그날의 산행 이후로 등산을 끔찍이도 싫어하게 되었고, 보통의 우리들은 웃으며 얘기하는 추억이 되었고, 나에겐 그저 좋았던 기억으로만 남았던 지리산 종주.



거기에 가면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매일이 무기력하고 시도 때도 없이 술만 마시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럴 수가!



지리산 종주 4박 5일, 지리산 둘레길 종주 4박 5일, 총 10일을 계획 잡고 떠나, 비록 지금은 도살장의 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내 얼굴 어딘가에 조금이라도 미소가 걸려있기를, 미소까지는 아니더라도 구겨진 얼굴이 조금이라도 펴져 있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그 바람이 무색하게도

나는 지리산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웃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웃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다 좋았다. 지리산의 골짝도 7월을 맞이한 초록도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이 날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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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장마가 시작되는 첫날이었고,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산행계획을 변경하지 않았다. 여름 등산은 뙤약볕보다 차라리 비 내리는 날씨가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과연 옳았다. 날씨는 둘째치고 장마로 인해 등산로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 더욱 좋았던 것이다.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등산로에서 나는 미친년처럼 웃었다. 지리산의 꽃들과 비를 머금고 더욱 예뻐진 초록 들이 모두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았다.



꽃들의 잎새를 악수하듯 손에 쥐고 하하 웃다가 팔을 뻗어 아래까지 내려온 가지들과 악수를 하다가 이내 나무둥치를 껴안고 깔깔거렸다. 이렇게 듬직한 남자친구가 있었다면 내가 너를 껴안고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중얼거리며 웃고 또 웃었다.



그렇게 깔깔거리며 웃다 보니 웃음 끝에 눈물이 났다. 껴안을 사람이 없어 나무를 껴안고 있는 내가 한심해서 였을까? 모르겠다. 그냥 눈물이 났다.



나의 웃음은 어느새 울음으로 바뀌어 있었고, 잠 못 들던 밤 소주를 마시고 울던 때 보다 더 크게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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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나는 단지 웃고 싶어서 지리산에 간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겐 나를 웃게 해 줄 상대가 아닌 기대어 울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서른두 해 인생 동안

단 한 번도 내게 허락된 적 없었던,

기대어 울 상대가 필요했다.



간절히.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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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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