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지친 나에게 힘을 준 한 마디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어제 8시에 잠들어서 오늘은 6시에 일어났다. 너무 많이 울어서 기절하듯 자버렸다. 10시간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우울했다. 밥을 먹어도 기운이 안 나고 걷는다는 행위 자체가 너무 너무 싫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꾸역꾸역 텐트를 접고 꾸역꾸역 배낭을 챙겼다. 밥을 끓여 먹는 것도 너무나 귀찮았다. 해가 뜨기 전부터 한여름처럼 더웠다. 이 더운 날씨에 끓인 밥을 먹으려니 그런것부터가 이미 너무 짜증스러웠다.




눈을 떴으니 밥을 먹고 밥을 먹었으니 길을 이어간다. 모든 행동과 행동 사이에 생각과 판단이 끼어들 틈이 없다. 회로에 저장된 방식으로 몸이 저절로 움직일 뿐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는데 아무 생각을 안 했더니 몸은 평소의 습관대로 저절로 움직인다.




무슨 날씨가 이다지도 덥지?




분명 나무그늘에 텐트를 쳤는데 그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더위에 지친 나무들은 수분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파리 끝까지 잔뜩 말라있다. 더위에 말라버린 잎새는 햇빛을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복사열을 전달하는 것 같다. 해가 뜨기 전부터 더위 때문에 잠이 깬다.




어제의 육십령에서 할미봉까지의 길은 급경사에 로프를 잡고 올라야 하는 암릉지대였지만, 오늘 서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나무그늘의 완만한 능선길로 시작된다. 나무그늘의 완만한 능선길인데도 결코 시원하지도 편안하지도 않다. 박배낭을 메고 땡볕의 공격을 받으며 기어간다. 체력도 없고 기운도 없고 등산을 이어갈만한 기분도 아니다.




완만한 능선길 이후 몇 번의 오르막을 오르고 나서 바위에 등을 기대고 낮잠을 자버렸다. 종주를 시작한지 한 시간만에 퍼져버린 것이다. 8시에 종주를 시작해서 9시에 낮잠을 잤으니 낮잠도 아닌 엄연히 아침잠이다. 만사가 귀찮다. 한겨울이 아닌 햇볕을 가득 받는 이런 계절에도 우울증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나의 우울감에는 분명 날씨의 영향도 있었다. 선선한 날씨만 유지되었어도 이토록 우울하지는 않았으리라. 바람 한 점 없는 5월의 땡볕에 모든 감정이 싸그리 말라버리고, 나의 심연을 차지하고 있던 우울감만 남아있게 되었다.





SE-23a26454-6f94-4d72-b242-6e1b6d468111.jpg?type=w1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3년 백두대간 ※





그늘에서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기분은 다운다운다운. 체력도 다운다운다운. 온 몸에 적색신호가 들어왔다. 이대로 길을 걷다가 어느 암릉 봉우리에서 잡고 있던 손을 일부러 놓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일부러는 아니더라도 적색경보가 울린 몸뚱이가 실수로 손을 놓쳐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암릉에서 손을 놓쳐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다해도 그것이 실수였는지 아닌지는 나 자신도 모를 것 같았다.




서봉을 코 앞에 두고 다시 배낭을 던져버렸다. 땡볕을 약간 피한 어느 바위 틈에서 초코바로 당 충천을 한다. 당분을 밀어넣어도 체력과 활력이 충전되지 않는다. 큰일이다. 다시 잠이 온다.




턱 관절만 간신히 움직여 초코바를 여물여물 씹으며 눈이 가물가물 감기고 있는데 바위 사이로 사람 하나가 올라왔다. 지리산에서 만나고 어제 또 만났던 '캔맥주 아저씨' 였다.




"여어~

또 만났네!"




언제나처럼 먼저 인사하는 아저씨. 아저씨 덕분에 겨우 눈꺼풀이 떠졌다. 오랜만에 만나고도 우울한 인사만 전했던 어제의 만남이 죄송해서 오늘은 최대한 기력을 짜 내었다.




"아... 아저씨... 안녕하세요..."




"왜 이렇게 좁은데서 쉬고 있는 거야?"




"아... 너무 더워서요.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겠어요."




"그렇지? 오늘은 나도 정말 힘들다. 코스도 정말 힘든데 날도 너무 더워. 무슨 5월이 이렇게 덥지?"




아저씨는 나를 따라 이 좁은 암릉 사이에 몸을 기대고 물을 들이켰다. 그런데 나는 문득 궁금했다. 나보다 체력도 좋고 걸음도 빠른 아저씨가 왜 항상 내 뒤에 따라오는 거지?




"아저씨는 항상 체력도 짱짱하고 걸음도 빠르신데 어째서 저랑 비슷하게 대간을 이어가시는 거죠? 속도로만 보면 아저씨가 저보다 한참 앞서 나가실 것 같은데 말이죠."




"나는 하루 분량 거리를 정해놓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미련 없이 거기서 끝내버려. 3시건 4시건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로 휴식모드에 들어가. 그래야 지치지 않고 끝까지 이어갈 수 있거든."




아...

그래서 혼자 일시종주를 하면서도

저렇게나 즐겁게 다닐 수 있는 거구나!




아저씨는 9일차인 오늘까지도 체력적으로 힘들거나 혼자라서 외롭지는 않다고 하셨다. 나도 저렇게 다녔어야 했는데. 에너지와 감정을 잘 분배해서 종주를 이어갔어야 했는데. 나는 걸음이 느리고 속도가 쳐진다는 이유로 걸을 수 있을 때 바짝 걸어서 남은 코스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언제나 목표한 곳에 도착하고도 시간이 이르다 싶으면 계속 걷곤 했었다. 오후 6시반이 되기 전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어떤 때는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까지도 계속 걸었다. 하루 8시간 종주는 기본이었고, 어떤 날은 휴식시간을 제외하고도 10시간 넘게 걸었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가 더디었고 날이 지날수록 기분이 가라앉았다. 자고 일어나도 에너지가 채워지지 않았다. 젊은날의 에너지를 탕진해가며 대간을 이어가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쌓아왔던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젖 먹던 시절의 에너지까지 당겨서 쓰는 그런 기분.




몸이 지치니 즐겁지가 않고

즐겁지 않으니 걸음이 축축 늘어졌다.




"어제도 4시 되기 전에 육십령에 닿았는데, 육십령 휴게소에서 맥주 하나 사 마시고 택시타고 내려가서 바로 모텔 잡아서 쉬었어. 잠은 좋은데서 푹 자야 피로를 풀 수 있거든."




아... 부럽다. 저런 여유.

나도 중년의 나이가 되면 아저씨처럼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부리고 심리적으로도 쫓기는 듯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나는 언제나 쫓기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코스로 빨리 빨리 진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유는 모른다. 해가 밝을 때는 그냥 무조건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SE-2dcc2e20-0adc-460c-91cf-9f942bb0143c.jpg?type=w1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3년 백두대간 ※





"어제 나 도착하기 직전에 육십령 휴게소 다녀간 거 맞지? 거기서 쌀을 샀다는 여자가 아가씨 맞지? 휴게소 사장님이 아가씨 엄청 칭찬하더라. 여학생 혼자 박배낭 메고, 쌀이 떨어졌는데도 탈출하지 않고 다시 대간을 이어가더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더라고. 사장님 눈에는 아가씨가 어리게 보였나봐. 계속 대학생이라고 표현해서 아가씨를 말하는게 맞는지 긴가민가 했어. 하하하."




핫?!!

대학생?

나이 서른 둘에 대학생?

그렇게 오해받을 정도로 내가 동안이라는 거지?!!




땡볕 때문에 가물가물 감기던 눈이 나도 모르게 확 떠졌다. 땡볕과 우울감으로 축축 쳐지던 어깨에 갑자기 힘이 빡 들어갔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체력과 활력이 '대학생' 이라는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채워질 줄이야! 나는 대간 종주 9일만에 처음으로 미간을 펴고 큰 소리로 웃었다.




아저씨와 함께 서봉을 오르고, 이후로 삿갓재 대피소까지도 아저씨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함께 걸었다. 원래의 아저씨 였다면 "나 먼저 갈게." 하고 바람처럼 사라졌겠지만 그 날은 아니었다.




아저씨는 오늘 육십령에서 대간종주를 시작한 탓에 나를 만났을 때 이미 꽤 지쳐 있었고, 나는 육십령에서 3.5km 더 들어온 곳에서 비박을 했기에 그만큼 이동거리가 짧았다. 그래도 아저씨보다 나의 걸음이 더 느리긴 했지만.




"그런데 아저씨는 왜 그렇게 체력이 좋아요? 처음 등산하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저보다 훨씬 잘 걷는 거죠?"




"등산은 처음이지만 사이클을 좋아해서. 거의 매일 두세시간씩 자전거를 타거든. 첫 등산이 백두대간이라 잔뜩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괜찮더라고. 그런데 아이고. 오늘은 진짜 힘들다. 처음으로 힘든 거 같아."




등산을 다녀보면 초보티가 팍팍 나는데 하루종일 걸어도 지치지 않는 강철체력의 아저씨들이 있었다. 그 아저씨들의 공통점은 취미가 사이클이거나 축구인 아저씨들이었는데 거의 매일같이 자전거를 타거나 축구를 한다고 했다.




나도 평소에 운동 좀 해둘걸. 주기적으로 하는 운동이라곤 숨쉬기 운동밖에 없던 인간이 겁도 없이 백두대간에 뛰어드니 나는 첫날부터 죽을 것 같았다. 아저씨는 9일만에 처음으로 힘이 든다니, 여러모로 부러운 아저씨다.




강철체력의 아저씨도 지치게 할 만큼 덕유산의 남쪽코스는 가파르고 힘들었다. 육십령에서 할미봉으로 오르는 길에도 계속 암릉에 로프가 나타나고, 할미봉부터 서봉까지는 완만한 산책로가 이어지다가 다시 암봉이 이어진다. 날씨때문이었던 것인지 실제로도 그런 것인지, 나는 할미봉을 오르는 것 보다 서봉을 오르는 것이 훨씬 훨씬 힘들었다.




서봉을 지나면 깎아지른 내리막이 이어지는데 철계단으로 이어지는 아찔한 내리막을 내려가는 것이 너무나 두렵다. 내려간 만큼 다시 기어 올라가야 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SE-d1db0b60-0239-43bd-904b-c0f9ec770507.jpg?type=w1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3년 백두대간 ※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4구간

진행 구간 : 할미봉 1km이후 비박(전북 장수와 경남 함양의 경계)-덕유산 서봉(전북 장수와 경남 함양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5월 8일 / 화요일
episode61.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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