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서봉에서 남덕유산까지의 거리는 고작 1.5km지만 깎아지른 철계단을 끝없이 내려갔다가 다시 끝없이 올라가야 한다. 하아... 정말이지 지친다. 저 봉우리를 올라갈 체력은 땡볕에 다 말라버리고 말았다. 아저씨도 계속 가다서다를 반복한다.
드디어 '남덕유산' 에 오르고나면 이때부터는 등산로가 조금 괜찮아지지만, 지금까지의 코스에 비해 괜찮다는 것이지 절대로 완만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게다가 남덕유산 정상에서 삿갓재 대피소까지는 4km가 넘는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이어지는 것이 등산인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덕유산의 남쪽능선처럼 지치는 코스가 지겹도록 이어진 곳도 못 봤다. 여기에 비하면 설악산의 공룡능선은 차라리 편한 길이었다.
대피소 직전 마지막 봉우리인 삿갓봉을 지날때, 당일배낭을 멘 밤톨머리 아저씨가 육상경기를 하듯 달려서 우리를 지나쳐간다. 캔맥주 아저씨와 나는 멍하니 그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뭐지?
저 사람도 분명 육십령에서 올라왔을텐데
어째서 이 험난한 코스에서
아직도 달려갈 체력이 남아있는 거지?
모르긴 몰라도 캔맥주 아저씨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리가 기어가는 곳을 쌩쌩하게 달려 가는 저 사람이 미치도록 부럽다.
오후 6시. 드디어 삿갓재 대피소에 도착했다. 남덕유산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3시간이나 걸렸다. 그나마 캔맥주 아저씨가 있어서 이 시간에라도 도착할 수 있었다. 아저씨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해가 지고 난 이후에 울면서 도착했으리라.
무릎과 발바닥에서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대피소에 들어가 자리를 배정받고 다리를 뻗어 무릎을 주물렀다. 주무르는 것 만으로는 통증이 해결되지 않아서 멘소래담 로션을 발랐다. 종주 첫날 이웃님께 받았던 근육통 로션이다. 이거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단 한번 이웃의 관심이 이후로도 여러 날 동안 나를 살렸다.
취사장으로 갔더니 대피소의 사람들이 여기 다 모여있었다. 평일의 대피소에는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있었다. 캔맥주 아저씨와 내가 나란히 서서 각자의 저녁식사를 끓이는데, 우리 바로 옆자리에 아까의 밤톨머리 아저씨가 서 있었다. 역시나 인사성 좋은 캔맥주 아저씨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
"어쩜 그렇게 체력이 좋으세요?
이 힘든 코스를 뛰어가시다니요."
밤톨머리 아저씨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하하. 아닙니다.
저는 배낭이 작잖아요.
두 분은 백두대간 종주를 하시는 건가요?"
"네. 일행은 아닌데 어쩌다보니 같은 날 시작해서
오늘 여기서 다시 만났네요."
"아, 저도 백두대간 종주 정말 해보고 싶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아직도 시작을 못 했어요.
두 분 정말 부럽습니다."
그러면서 밤톨머리 아저씨는 자신이 먹던 소고기를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두 분 이것 좀 드세요. 그런데 죄송해요. 시간이 없어서 마트에서 대충 사왔더니 고기가 영 맛이 없네요. 드셔보시고 맛 없으면 안 드셔도 됩니다."
김치 하나 없이 개밥같은 국밥이 전부였던 우리 둘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젓가락을 내밀어 하나씩 고기를 집어 먹었다. 이 산에서 삼겹살도 아닌 소고기를 염치 없이 먹어도 될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밤톨머리 아저씨는 우리가 먹지 않으면 소고기를 버릴 테세였다. 맛이 없다며 계속 툴툴거린다.
아흑... 그런데 씨바...
무슨 고기가 이렇게 맛있어?!!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
캔맥주 아저씨와 나는 고기가 너무 부드럽고 맛있다며 감탄에 감탄을 쏟아냈다. 둘 다 표정관리를 못하고 고기를 씹으며 눈물을 흘릴듯 감격해 했다. 밤톨머리 아저씨는 당황하며 남은 고기를 모두 양보해 주었다. 친절하게도 직접 고기를 다 구워서 우리에게 나눠준다. 밤톨머리 아저씨는 자신의 김치찌개와 소주도 나눠주었다. 정작 본인은 거의 먹지 않았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것이 소원이라더니, 우리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른 모양이었다.
대피소에 도착할 땐 눈이 반쯤 풀려있던 캔맥주아저씨와 나는, 저녁을 먹고 헤어질 땐 둘 다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고기를 먹어야 하고
술이 있어야 한다.
다음 날. 자고 일어났더니 며칠동안 나를 괴롭히던 우울감도 많이 가라앉았고 실내에서 편하게 잔 덕분에 체력도 많이 회복되었다.
밤톨머리 아저씨는 이미 떠나고 없었고, 함께 아침식사까지 마친 캔맥주 아저씨는 "나 먼저 갈게. 천천히 와." 라는 인사만 남기고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짐을 챙기고 천천히 종주를 시작했다.
뾰족한 봉우리들이 줄지어 이어진 여느 산과 다르게 언덕처럼 완만한 곡선의 봉우리들이 미끄러지듯 연결된 덕유산의 주능선. 해발 1500m 를 오르내리는 봉우리에 나무는 거의 없이 여린 풀들이 산을 가득 채우고 있다. 여린 풀처럼 덕유산의 주능선도 여릿하게 이어져서 오르막과 내리막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부담스러운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말려버릴 것 같은 태양이었다. 시야를 가리는 것 하나없이 사방이 탁 트인 초지의 덕유산이, 이렇게나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모두 땡볕 때문이다. 한 뼘의 나무그늘이 없어서 숨이 턱턱 막혔다. 이 높은 산에 바람 한점 불지 않는다.
도대체가 숨을 못 쉬겠다.
공기마저 전부 태워버릴 날씨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봄 등산이 처음이었던 나는 이런 날씨가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산에는 철쭉이 있고 아직은 5월 초순인 날짜를 생각하면 분명 봄인데, 8월의 도시보다 5월의 백두대간이 더욱 찌는 듯이 더웠다. 원래 봄에는 등산을 하는 것이 아닌 것인가? 봄에도 이토록 더운데 여름에는 도대체 어떻게 다닐 수 있을까? 앞으로 계속 이어가야 할 남은 날들이 공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너무 쨍하고 대기중엔 가스가 가득차서 능선 아래 풍경은 물에 빠트린 수채화보다 더욱 흐려보였다. 우리나라 5대 명산 안에 든다는 덕유산이 한순간에 별 볼일 없는 산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놈의 날씨 때문에!
가도 가도 나무그늘 하나 없는 능선을 걸으려니 진이 쪽 빠진다. 해발 1500m를 넘나드는 고산지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고 그러니 아무리 둘러봐도 눈이 즐거울 색은 찾을 수 없었다. 지나는 다른 산객들도 경치 감상 따위는 모두 땡볕에 반납하고 오로지 자신의 발치만 내려다보며 꾸역꾸역 걷는다.
아무래도 봄에는 종주를 하는 것이 아닌가보다.
가을에 종주를 할 때는 분명 이렇지 않았다.
가을에는 볕이 강하게 내리쬐어도 높은 곳에 오르면 바람이 불었다. 대기에 가스가 가득 찬 것 같은 뿌연 날도 없었고 황사먼지도 없었다. 아무리 높은 고산지라도 나무가 있는 곳엔 숲이 가득했고 초록잎과 붉은 단풍의 조화로 탁 트인 조망지가 없어도 눈이 즐거웠다.
지난 가을과 올 봄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이것이 불과 6개월만의 변화라는 것은 더욱 믿을 수 없다. 도시에서는 가을보다 봄을 더 좋아했던 나였다.
봄에는 높은 산에 오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봄에는 철쭉이 피어있는 낮은 산만 찾아다녀야 하는 모양이다. 흩날리는 벚꽃아래서 도시의 정취를 만끽하는 것이 산을 오르는 것 보다 몇 백배 나은 선택이리라.
긴 겨울 끝의 봄이
이토록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백두대간에서 알게 된다.
무룡산과 동엽령을 지나 백암봉에 도착했다. 여기서 북쪽의 향적봉으로 향하는 것이 일반 산행자들이 선택하는 덕유산의 주능선이고, 백두대간은 동쪽으로 꺾어지며 귀봉 못봉 갈미봉으로 이어진다. 덕유 능선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던 다른 등산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향적봉으로 직진하고, 나 혼자만 동쪽의 귀봉으로 향한다.
낯 모르는 사람이라도 말 한마디 섞지 않는 사람이라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이젠 국립공원에서 벗어나 다시 외로운 대간길이다. 사람때문에 힘들어 백두대간으로 도망을 쳤는데 몇날 며칠 사람을 만나지 못하니 그 때문에 더욱 힘들어진다.
나는 귀봉과 못봉, 대봉을 지나 갈미봉에 도착하기 직전에 오늘의 야영지를 정한다. 이 땡볕에 16km를 걸었다. 쉬었던 시간은 제외하고 오로지 이동한 시간만 계산해도 9시간 30분이 걸렸다.
나무숲도 없는 곳을 너무 오래 걸은 것이 문제였을까? 나는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것 같았다. 계속 물을 들이켜도 목이 마르고 씹어서 삼키는 것은 아무것도 내키지가 않았다. 하루종일 걷고도 먹는 것이 싫어서 저녁을 굶었다.
오렌지 청포도 맥주
오렌지 청포도 맥주 이온음료
오렌지 청포도 맥주 이온음료 탄산음료
오렌지 청포도 오렌지 청포도 오렌지 청포도...
하루종일 시원하고 달달한 것만 떠오른다.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머리 위로 오렌지와 청포도가 둥실둥실 떠다닌다.
나는 어제부터 눈이 침침하니 아파왔다. 오늘도 하루종일 눈이 아프더니 저녁쯤 되자 제대로 뜨기도 힘들었다. 햇볕에 동공이 탄 것일까?
햇볕때문에 기운도 너무 없었다. 나는 도시에서도 여름이면 친구들과 시내를 돌아다닐 수 없었다. 친구들에 비해 금세 지치고 헉헉댔기 때문이었다. 5년 전부터는 햇빛알러지 같은 것도 생겼다. 반팔을 입는 계절이면 팔에 붉은 반점이 생기곤 했는데 친구가 햇빛알러지 같다고 했다. 정확하진 않다. 병원에 가보진 않았으니까.
이번 대간길에서도 비가 그친 이틀 후부터 팔에 붉은 반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붉은 반점들은 햇볕이 강렬했던 어제 오늘, 미칠듯한 가려움증까지 동반했다. 계속 긁다보니 피부가 벗겨질 듯 아파서 더이상 긁지도 못하고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러가며 가려움증을 참고 있었다.
하아...
이런 몸뚱이로 이런 계절에
무슨 대간을 타겠다고...
괴롭고 힘들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몸은 물론이거니와
시간이 흐를수록
멘탈이 더욱 삐걱대고 있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4구간
진행 구간 : 덕유산 서봉(전북 장수와 경남 함양의 경계)-남덕유산-삿갓재 대피소 숙박-무룡산-동엽령-백암봉-귀봉-못봉-대봉-700m 비박(경남 거창과 전북 무주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5월 8일~9일 / 화~수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