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이유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텐트에 누워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떤 날은 너무 외로워서 친구나 가족에게 전화를 하고, 어떤 날은 그마저도 하고싶지 않을 정도로 심연에 가라앉기도 한다. 나의 생사를 걱정해서 매일 전화해 주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친구에게 전화해서 시작부터 끝까지 푸념만 늘어놓았다. 등산로가 너무 힘들고, 어깨 무릎 발바닥 허리까지 안 아픈데가 없고, 날씨가 너무 덥고, 목이 너무 마르고, 눈도 너무 아프고, 입맛도 없고, 외롭고 쓸쓸하고 미칠 것 같다고.




친구는 당장 하산해서 서울로 돌아가라고 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래도 대간 종주는 마무리 해야지."




"왜?"




왜냐고?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냥 하는 거다. 이유는 모르지만 끝까지 가야할 것 같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면 내가 금요일에 찾아갈게. 금요일에 백두대간이랑 국도가 만나는 곳에서 우리도 만나자. 지도 확인해보고 알려주면 내가 근처에 있는 모텔이나 팬션을 예약할게. 먹고싶은 것도 알려줘. 제대로 몸 보신 시켜줄테니까 사양하지 말고."




끼얏호~!!!

정말? 정말? 거짓말 아니지??




친구는 회사에 연차를 쓰고 오전에 장을 봐서 점심이후로 출발하겠다고 했다. 고기를 사갈까? 치킨이 좋아 삼겹살이 좋아? 라고 묻는 친구에게




"그런 거 다 필요 없으니

과일이랑 음료수만 사 와!"




라고 대답했다. 친구와 전화를 끊고나니 에너지가 활활 솟아 올랐다. 오늘이 수요일이니 이틀만 지나면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나 쉬운 것이었다면 진작에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걸 그랬다. 그동안 국도나 지방도는 하루에도 몇번이나 지나쳤고, 친구의 회사는 비교적 자유롭게 연차를 사용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진작에 친구에게 부탁할 걸. 나의 백두대간 종주를 지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내가 먼저 지원을 요청한 적이 없었다.





SE-f2b13b42-4650-4221-af5b-2f7da8906ec6.jpg?type=w1 © josephtpearson, 출처 Unsplash





생각해보면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내가 먼저 도움을 요청한 적도 없으면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며
좌절하곤 했었다.





도움을 요청했다면

직장동료나 친구나 가족 중

누구라도 나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지 않았을까?




나는 진심어린 도움은 요청하지 않은 채 언제나 불평불만만 쏟아내는 사람이었다. 외롭고 쓸쓸하고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괴로움은 꽁꽁 숨긴 채, 그 모든 마음을 불만으로 포장해서 푸념과 하소연으로 터트리곤 했었다.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도움을 요청했다면 누군가 한명쯤은 진정으로 나를 도와주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방법을 몰랐고 방법을 알았다 하더라도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의 모든 고민과 두려움을 다 얘기했는데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나를 안아주지 않으면 더욱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욱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깊은 고민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손을 내밀어 보지도 않고 내 멋대로
그렇게 결론내리고 살아왔던 것이다.





다음날은 8시에 일어났다. 겨울종주를 제외하고 가장 늦게 일어난 날이었다. 친구를 만나기까지 시간은 이틀이 남았는데 이동해야 할 거리는 23km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매일 15~18km 씩 걷다가 갑자기 11km로 거리가 줄어드니 마음에도 여유가 넘쳤다.




느릿 느릿 아침을 먹고

느릿 느릿 오늘의 종주를 시작한다.




갈미봉을 지나 빼재에 닿았다. 빼재에서 37번 국도를 건너 '삼봉산' 을 오르는 것이 다음코스다. 빼제에는 '사과의 고장 거창입니다' 라는 표지석과 함께, 좀 쉬었다 가라고 유혹하는 멋들어진 정자가 있었다. 등산화를 벗고 정자로 올라가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며 시나 군, 도의 경계가 바뀔 때마다 묘하게 기분이 좋다. 게임에서 레벨이 하나씩 올라가는 기분이다. 시나 군의 경계가 바뀔때는 작은 옵션이 주어지다가 도의 경계가 바뀌면 그때마다 보석이 하나씩 주어지는 것 같다. 보석을 모두 모아 백두대간 종주를 마무리하면 어마어마한 파워가 생기리라!





SE-7d0104c0-51c2-4210-a591-322eda7d54ef.jpg?type=w1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3년 6월 백두대간 ※





작년에 백두대간 남진을 하며 강원도에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까지 내려왔고, 올해 백두대간 북진을 하며 경상남도에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까지 올라왔으니, 출발지 한 곳을 제외한 5개의 보석이 나의 캐릭터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터였다.




총 7개의 보석 중
벌써 5개를 획득했다!




이 정도 레벨이면 누구를 만나도 지지 않을 레벨이다. 내가 이겨야 할 상대는 내 자신 뿐이었다. 지긋지긋한 저질체력과 순두부처럼 흔들리는 멘탈을 어떻게 잘 붙잡고 가는지가 관건이었다.




다시 배낭을 메고 국도를 건너 '삼봉산' 으로 향하는 데크계단을 오른다. 여느 산이 다 그렇듯 국도를 지나고나면 능선에 닿기까지 가파른 경사가 이어진다. 하지만 괜찮다. 여기는 나무가 울창한 숲길이니까. 덕유산 주능선처럼 그늘 하나 없는 초지만 아니면 다 괜찮다. 오늘도 역시나 미친듯이 푹푹 찌는 날씨다.




가파른 경사는 의외로 10분만에 끝이 나고 이후로는 완만한 등산로가 이어졌다. 나무숲이 울창하여 조망지가 없었지만 어제의 덕유능선에서 된통 당한지라 조망지가 없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을 하며 길을 이어간다.




매일 등산을 하다보면 작은 것에도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빽빽한 나무숲을 이틀 내내 걷다보면 딱 한번 나타난 조망지가 감사하다. 사방팔방 조망지에서 햇볕에 두들겨 맞다가 한 뼘의 나무그늘을 만나면 눈물이 나도록 감사하다. 땡볕의 나날을 맞이하다가 비가 내리면 그 또한 너무나 감사하고, 몇날며칠 비만 맞고 돌아다니다가 해가 반짝 나면 신의 은총을 받은 듯 감사하다.




문제는 감사의 마음을 느끼기 직전까지 계속 욕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봄날의 종잡을 수 없는 날씨와 남쪽의 대간길은 뭔가 궁합이 안 맞았다. 그러니 욕을 할 상황은 매번 생겼고 진이 쪽 빠져서 욕을 할 힘도 없을 때 빼고는 거의 매번 욕을 하며 길을 이어갔다. 어떤 구간에서는 사뿐이 내딛는 걸음 걸음마다 고운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또 다시 산죽길이 나타난다. 저번처럼 어깨 높이는 아니었지만 허리까지 올라오는 산죽이 너무나 빽빽하여 등산로가 잘 식별되지 않는다. 북쪽의 대간길에서는 산죽이 종아리높이로만 자란데다 등산로가 널찍해서 그런 산죽을 보며 걷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남쪽의 대간길에서는 산죽이 거의 사람 키 높이만큼 자란데다 등산로를 가득 에워싸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그 아래 무엇이 있을지 몰라 공포감으로 머리가 쭈뼛해 진다. 등산로도 전혀 식별되지 않는 저 아래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으으으으~~~

까치발을 들고 재빨리 산죽길을 지난다.

하지만 산죽길은 쉬이 끝나지 않는다.

으으으~~ 제기랄!!




삼봉산의 정상부와 가까워지니 드디어 조망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야가 흐리다. 어제만큼 흐리다. 대기에 가스가 차서 흐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저 것이 다 황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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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삼일 째 눈이 너무 아프다. 처음엔 햇살이 강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황사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황사가 미친듯이 달려드는 이 계절에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비박을 할 때도 장소가 여의치 않아서 풀이 있는 초지가 아닌 흙이 풀풀 날리는 맨바닥 위에 텐트를 쳐야 했다. 그런데다 눈이 아플때마다 흙먼지 가득 할 손으로 눈을 비벼댔다. 이러다 결막염에 걸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여러모로

봄날에는

대간을 타는 것이 아니다.




오후 2시. 삼봉산 정상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한 시간을 쉬어버렸다. 아침에도 늦게 종주를 시작했는데 낮에 또 한 시간을 쉰다. 이렇게 쉬어가며 걸어도 5시가 되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다. 오늘은 삼봉산 고갯마루 아래에 있는 '소사고개' 까지만 갈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무리 일찍 도착해도 더 이상 진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 민박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7일째 머리를 감지 못했다. 이 땡볕에 땀을 쭉쭉 흘려가며 매일 강행군을 하는데 머리도 못 감고 이 날까지 버텼다. 그렇다고 거지꼴을 하고 친구를 만날수는 없었다. 최소한의 멀쩡한 모습은 유지하고 싶었다. 내일 만나게 될 나의 친구에게 예쁘고 뽀샤시한 모습을 보여줘야지!




신기한 건

사흘째 까지는 머리가 엄청 가렵더니

나흘째 부터는 가렵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더욱 신기한 건

도시에서는 이틀만 머리를 감지 않아도 대번에 티가 나는데, 산에서는 7일째 머리를 감지 않았는데도 주변 사람들이 모르더라는 것이었다. 땡볕에 기름기까지 말라버린 모양이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4구간~5구간

진행 구간 : 대봉 700m 비박(경남 거창과 전북 무주의 경계)-갈미봉-빼재-된새미기재-삼봉산(경남 거창과 전북 무주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5월 9일~10일 / 수~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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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6e08c026-a781-4cd5-916a-43ca6c9d2ebd.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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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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