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비박의 맛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삼봉산 정상에서 충분히 쉴만큼 쉬고 소사고개로 향한다. 나는 오늘 소사고개까지만 가면 된다. 3km만 더 가면 오늘 종주는 끝! 하하하 벌써부터 기분이 좋군!




하지만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곳이 백두대간인 것을 깜빡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곧 이어 뺨을 후려갈기는 것이 백두대간인 것을... 정상을 지난지 얼마되지 않아 암릉이 나타난다. 암릉 위로 로프구간도 나타난다. 이정도는 괜찮다. 나는 바위를 애정하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 부터였다.




암릉이 끝났나 싶으니 미친듯한 내리막이 이어진다. 그야말로 내리 꽂는다. 으악~ 내 무릎! 으으~ 내 발바닥! 경사가 가파를수록 차라리 오름짓이 낫다. 일부러 넘어져서 데굴데굴 굴러 산 아래까지 내려갈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접는다. 그러고도 몸이 성할 것 같으면 이미 많은 산객들이 시도를 했겠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내리막도 결국은 끝이 난다. 끝없이 가라앉는 인생이란 없는 것이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면 몸이 회복될 때 까지 충분히 쉬었다가 다시 올라서면 된다. 문제는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다.




길은 잘못이 없다.
인생은 잘못이 없다. 잘못은 언제나
나의 마음이 저질러 내는 것이었다.




드디어 평지가 나타나고, 드디어 소사고개에 도착했다. 지방도와 만나는 소사고개에는 '소사마을' 이 있고, 그곳에 민박과 매점을 겸한 '탑선슈퍼' 가 있다. 나는 오늘 탑선슈퍼에서 박을 할 것이다.





SE-66240ebb-c963-4804-9035-65e96b100d45.jpg?type=w1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3년 6월 백두대간 ※





그런데 슈퍼의 문이 잠겨있다. 문 앞에 적혀있는 사장님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보니, 지금이 한창 농사철이라 바쁘다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슈퍼 앞 평상에 앉아 사장님이 오시길 기다린다. 40분쯤 기다리니 드디어 밭일을 끝내고 사장님이 오셨다.




슈퍼에서 참치캔과 라면을 사고 방을 안내 받는다. 슈퍼 뒤쪽으로 주인댁이 거주하는 집이 있고 그 한쪽에 민박을 주는 방이 따로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일찍 종주를 마무리했다. 으아아아~!! 종주를 하다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




뜨끈한 물에 샤워를 했다. 머리를 몇 번이나 감았는지 모른다. 묵은 때가 다 벗겨지고 향기가 퐁퐁 입혀질때 까지 다시 감고 다시 감았다. 샤워를 끝내고 나서는 배낭을 싹 풀어서 짐을 재정비했다. 말릴 것은 말리고 닦을 것은 닦고. 버릴 것은 없다. 이것이 집생활과 비박생활의 차이. 집생활은 살면 살수록 버릴 것이 쌓이는데 비박생활은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꼭 필요한 물건만 남는다.




그리고 드디어 저녁을 먹는다. 오늘 저녁엔 참치캔도 있다. 오랜만의 단백질 섭취다. 매일 비슷비슷한 국밥만 먹다가 가끔 참치나 스팸을 먹게되면 나의 미각이 살아서 춤을 추는 것 같다. 먹는 것이 타성에 젖어있을 때도 백두대간은 아주 큰 도움이 된다. 무엇을 먹든 다 맛있어지고 참치캔이나 소세지 하나에도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되니까.




밥을 다 먹고 바로 양치질을 했다. 아까 샤워하면서 했는데 또 한다. 이 또한 대간을 타는 중에는 거의 하지 못하는 것. 수량이 풍부한 계곡이나 약수터를 만나지 않는 이상 못하는 행위가 바로 양치질이다. 마실 물도 없는데 양치할 물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은 문명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날이다.




비박도 좋지만 비박의 중간중간에 숙박을 곁들이는 것이 더 좋다. 사람은 쓰면 쓸수록 더러워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산에서 만난 아저씨는 잠은 꼭 편한데서 자야한다며 구간마다 하산하여 모텔을 찾았지만, 나는 산에서 자는 것이 더 편했다. 사람이 쓰면 쓸수록 깨끗해지는 존재였다면 나는 시작부터 끝까지 비박으로만 이어갔을 것이었다.




산에서 자고 일어나면 도시에서 쌓인 몸 안의 독소가 깨끗하게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숲이 울창한 능선의 안부보다 탁 트인 봉우리에서 자는 것이 더 좋았다. 달빛의 따스한 기운이 자는 동안 나에게 스며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높은 봉우리에서 잠을 자야 다음날 시작을 내림짓으로 할 수 있다. 이것은 정말이지 중요한 포인트다. 하루의 시작을 오름짓으로 하는 것과 내림짓으로 하는 것은 하루종일 걸을 수 있는 양의 차이를 가져올 정도니까.




계곡처럼 흐르는 물 옆은 개운하게 씻고 식사를 하기엔 좋지만 잠을 이루기엔 별로였다. 자는 동안 계곡의 습한 기운이 몸을 가득메워 자고 일어나면 오히려 몸이 더 힘들어진다. 잠은 높은 곳, 탁 트인 곳, 습기가 없는 곳에서 자야 한다. 그렇게 자는 것에 익숙해지고 나면 비박을 끊을 수 없게 된다. 비박보다 더 편하고 건강해지는 잠자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SE-6f60075b-d7d0-4ec8-a0f9-2c755bf2fd7a.jpg?type=w1 ※ 2013년 7월 나의 비박사진 ※





다음 날, 방에서 아침을 끓여먹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주인집은 벌써부터 밭일을 나간 것인지 안채에 인기척이 없다. 내가 사용한 방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쓰레기는 봉지에 담아 입구 앞에 놓아두고, 마당에 서서 주인 없는 빈 집에다 대고 고개숙여 인사를 전한다.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민박집에서 나오니 날이 많이 흐리고 제법 쌀쌀했다. 어제의 민박은 여러모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비박을 했다면 밤새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을 것이었다.




오늘은 금요일! 시작부터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다. 오늘은 초점산의 삼도봉과 덕산재를 지나 부항령까지만 갈 것이다. 그리고 부항령의 지방도에서 차를 운전해서 오는 친구와 만날 것이다. 암릉 하나 없는 완만한 능선길을 13km만 가면 끝이다.




고도도 높지 않다. 가장 높은 대덕산이 해발 1290m인데 민박을 한 소사마을이 이미 해발 600m가 넘는 곳이었다. 그러니 600m 남짓의 높이만 오르면 되는 것이다. 유후~ 이렇게나 편안한 산행이라니! 어제와 오늘은 거의 쉬어가는 코스다. 매일 이정도로만 걷는다면 힘든 것 하나 없이 적당한 운동만 될 것 같다.




나중에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흘러 나의 어린시절 트라우마가 모두 치유되고 녹초가 되지 않아도 잠을 푹 이룰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런 산행을 해보고 싶다. 매일 적당히만 걷고 비박을 하고싶다. 등산이란 딱 운동이 될 정도로만 하고싶다. 지금의 나는 무척이나 몸이 상하는 등산을 하고 있다. 언제나 나의 기력을 짜내어 한계를 넘어 서는 등산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소사고개에서 초점산 삼도봉으로 향하는 길은 매우 완만한 능선길로 시작된다. 능선이 어찌나 완만한지 한참을 걸어도 아직도 산이 아닌 밭이다. 사과밭을 지나는데 향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아직 과실은 손가락만 하니 이것은 사과나무의 꽃향기인 모양이다.




일찍부터 사과밭의 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예닐곱의 사람들이 사과나무에 옹기종기 모여 나무에 매달린 과실을 돌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런 곳에서 밭일을 하며 여비를 모을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안타깝다! 오늘 오후에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만 하지 않았어도, 나는 바로 경로를 이탈해서 사과밭으로 향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혹시 남는 일자리가 없는지 물어봤을 것이었다.




왜 하필 이런 타이밍인지!




외로움에 밀려 산을 다니다가

처음으로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인데

일자리가 눈에 보인다.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걸음을 서두른다. 멀리서 찾아와주는 친구를 인적 없는 산마루에서 홀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므로.




백두대간 근처의 시골마을에서 일주일씩 알바를 하며 대간종주를 이어가는 것도 의미있고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번기라면 일자리는 어디든 있을 것이었다. 일주일 알바하고 돈을 벌어 일주일 대간을 이어가고, 또 일주일 알바하고 번 돈으로 일주일 대간을 이어가고... 그런 식이라면 중간에 샤워를 위해 일부러 민박을 찾아야 할 필요도 없고, 대간이 끝나도 통장이 비워지긴 커녕 오히려 차곡차곡 채워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나의 체력이 너무 저질이다. 백두대간도 겨우겨우 이어가는 저질체력이 고된 밭일을 이겨낼 리가 없지. 알바비 벌려다 병원비만 무수히 깨질 가능성이 더 크다. 나는 곧바로 마음을 접어버렸다.




밭을 따라 가는 길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다. 도대체 언제 다시 산길로 접어들지?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나? 라는 의심이 굽이 굽이 아홉구비를 넘을 즈음 드디어 산길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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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잔뜩 흐리던 날씨는 산길에 접어들자마자 짙은 안개로 몰려왔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안개가 더욱 짙어진다. 안개가 어찌나 심한지 안개입자가 잎새 위에 물로 응결되어 바람이 불 때마다 비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정상부에 도착하기 전 경사가 심한 오르막을 오르는데도 덥지 않고 쌀쌀할 정도였다.




백두대간의 두 번째 삼도봉.

초점산 삼도봉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정상석이 너무 초라해서 놀랐다. 삼도봉이란 세 개의 도가 만나는 곳인데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북도에서 모두 이 곳을 기피한 것인지 아주 작은 꼬꼬마 정상석 뿐이다. 눈이 높이 쌓이는 계절이면 정상석을 찾지도 못할 정도로 매우 작았다.




삼도봉을 지나 대덕산으로 향한다. 대덕산의 정상에는 비박하기 딱 좋은 헬기장이 있었고, 대덕산에서 덕산재로 내려가는 길 중간에는 수량이 풍부한 계곡도 있었다. 나는 이런 내용을 지도에 표시했다.




언젠가는 백두대간 종주를 다시 하리라!

그때는 끝내주는 비박지를 기준으로 종주를 이어가리라!




다짐하며 나의 산행루트를 기록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5구간

진행 구간 : 삼봉산(경남 거창과 전북 무주의 경계)-소사고개 민박-초점산 삼도봉-대덕산 투구봉-덕산재(경북 김천과 전북 무주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5월 10일~11일 / 목~금

SE-24748733-97fd-4195-8fd4-d83418e36e89.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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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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