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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텐 Aug 30. 2021

그라나다 500년의 음악 여행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 아랍, 가톨릭 음악



바로크 클래식 음악


음반명: 그라나다 1013-1526

연주자: 라 카펠라 레이알 데 카탈루냐, 에스페리옹 21, 조르디 사발(지휘)

레이블: 알리아 복스




세상엔 참 다양한 음악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듣는 것은 빙산의 일각도 안되지 않을까. 모로코 천년의 고도 페즈(Fez)를 여행할때 마침 페즈 음악축제가 열리는 때였다. 매년 열리는 큰 음악행사이고 북아프라키와 남유럽을 중심으로 뮤지션들을 초청해 여는 국제적 축제였다. 아라비아, 소아시아, 발칸, 북아프리카 문명권의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대부분의 음악이 이슬람 전통음악과 연관이 있었다. 페즈의 오래된 건축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광장에서 아라비아의 음악이 연주되는 장면은 황홀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난생 처음 눈앞에 펼쳐지는 '아라비안 나이트' 같은 음악회를 넋을 잃고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중 그리스에서 온 '앙 코르다 En Chordais' 앙상블이 연주한 비잔틴과 그리스 지역의 옛 음악은 사라진 문명과 그 문명들이 지중해 권역에 남긴 음악적 유산을 완벽하게 들려주었다. 그들의 연주는 중앙아시아-아라비아-페르시아-터키-그리스의 문명을 아우르는 문화적 교류를 음악으로 들려주었는데 서양음악만 듣던 나에게는 망치로 얻어맞는 경험이었고, 우리 사회의 서구 편향적인 취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하게 되었다. 음악감상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된 개인적 사건으로 지금도 가끔씩 그때의 감동을 떠올려보곤 한다. 오늘 소개하는 음반 <그라나다 1013-1526>는 서구 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다른 문명이 성취한 위대한 문화를 맛보기에 충분한 음반이다.


페즈 음악축제가 열리는 밥 마키나 광장


음반 <그라나다 1013-1526>는 지휘자이자 음악학자인 조르디 사발이 11~16세기 스페인 남부에 세워졌던 그라나다 왕국을 중심으로 그 지역에서 명멸한 3대 문명의 음악을 연주한 음반이다. 중동과 소아시아에서 지중해 연안, 남유럽에서 북유럽까지 서양 음악의 뿌리를 탐구하고 있는 조르디 사발은 악단 르 콩세르 나씨옹, 히페리온 XXI의 지휘자이며 고악기 비올 연주자이자 탁월한 음악학자이다. 그의 탐구 정신은 서양 고음악의 숨겨진 레퍼토리를 발굴하고 동서양의 음악 교류를 연구해 이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연주, 녹음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진행하고 있다.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시대의 서양음악은 물론 그 뿌리가 된 아라비아, 유대, 가톨릭 음악을 역사적으로 고증해 고음악의 방대한 지도를 그리는 음악가가 조르디 사발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발칸 반도의 음악을 녹음한 <발칸의 영혼>, 이스라엘의 유대 음악을 녹음한 <예루살렘 - 두 평화의 도시>,  베르사이유의 음악감독 륄리의 작품을 모아놓은 <태양왕의 오케스트라>,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켈트 음악을 탐구한 <켈틱 비올 1, 2>, 오스만 터키와 아르메니아 지역의 음악을 담은 <이스탄불의 목소리 1430-1750>와 <이스탄불>,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동서양의 음악 교류를 그려낸 <오리엔트-옥시던트 I, II> , <아르메니안 정신>, 16세기 선교사 프린치스코 자비에르의 동방 여행길의 음악을 기록한 <동방에의 길>, 베토벤 9개 교향곡 등 그의 탐구는 중세 유럽과 동방의 제국들을 넘나든다.


조르디 사발의 조국인 스페인은 독특하게도 가톨릭, 유대, 이슬람의 문화가 공존하는 나라로 그의 음악적 관심은 스페인 음악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했다. 8~16세기 사이 무슬림 왕국이 명멸한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이슬람-가톨릭 퓨전 음악이 탄생한 문화의 용광로였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여려 문명이 몸을 섞었고 또 여러 무슬림 왕조가 명멸했다. 오늘날 스페인의 기타 음악이나 플랑멩코 음악을 들여다보면 아랍, 집시, 발칸과 유대의 음악이 기묘하게 혼합되어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넓게는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아라비아와 비잔틴을 거쳐 유럽으로 흘러들어온 음악의 유산이다. 이슬람 건축양식의 절정인 알함브라궁으로 유명한 스페인 남부의 도시 그라나다는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왕국인 그라나다 왕국(1013-1526)의 수도였고 세비야, 코르도바를 비롯해 동서양 문화의 복합적 양식이 혼재하는 대표적인 도시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17-18세기 오스만 터키의 음악을 담은 <이스탄불>


비올, 리라, 레밥 등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조르디 사발   


음반 <그라나다 1013-1526> 제작의 시작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라나다 음악축제를 개최하는 주최측이 그라나다 왕국 설립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르디 사발에게 그라나다 지역의 고전음악 고증을 부탁했다. 사발은 2013년 7월 자신이 고증한 음악을 알함브라궁의 카를로스 5세 궁전에서 연주했으며 이 실황 연주를 음반으로 발표했다. 우리는 이 음반을 통해 1013년 그라나다 왕국이 세워진 이후 500년의 이베리아 반도 역사를 여행할 수 있다. 5세기 이전에 이베리아 반도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터전이었으며 로마 제국의 영역에 속한 유대-가톨릭 문명의 지역이었다. 5세기경 게르만 서고트족이 칩입해 서고트 왕국을 세운 후 그들이 가져온 유럽 문화 & 비잔틴 문화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섞이기 시작하며 이 지역의 유대-가톨릭 음악은 콘스탄티노플의 동방정교 음악과도 연계성을 갖게 된다. 8세기경 서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무어인들은 이슬람 왕국을 세웠고 이베리아 반도는 또 한번 문화의 용광로가 된다. 아라비아의 음악이 토착 유럽 음악과 섞여 퓨전 음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고트족이 남긴 가톨릭 전례음악, 유대인들의 전통음악 등은 음지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며 아랍 음악과 공존하게 된다. 규범이 강한 전례음악보다 서로 혼종이 쉬웠던 세속음악은 유대-가톨릭, 비잔틴, 아라비아 양식이 서로 뒤섞이며 서유럽과 다른 동방색 짙은 독특한 이베리아의 음악을 낳게 되었다. 음반 <그라나다 1013-1526>는 바로 이런 문화의 용광로 속에서 태어난 3종류의 그라나다 음악을 아래와 같이 담고 있다.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한 유대인(세파르디) 음악

북아프리카, 중동에서 온 아라비아 음악

서고트족의 중세 가톨릭 음악 (+비잔틴 음악)


실제로 그라나다에는 유대인 지구와 무어인 지구(알-바이신)가 나뉘어져 있으며 여행객들에게 문명의 역사적 흥망을 직접 보여주고 있다. 알함브라궁을 관람하려면 알-바이신 지역으로 가면 된다. 이 지역의 타일 문양이나 일상생활 곳곳에 활용되고 있는 아라베스크 문양, 까무잡잡한 피부와 곱슬머리의 사람들을 보면 이곳이 과거 이슬람 왕국의 중심도시였고 그들의 DNA가 남아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유럽이지만 유럽이 아닌 곳. 그라나다 뿐만 아니라 고도 세비야, 코르도바 역시 그렇다. 여하튼 세 가지 음악과 세 가지 문명이 현재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의 뿌리를 이루었고 그 음악적 실체가 조르디 사발의 학구적인 탐구 속에서 되살아난 셈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고 음반을 들어보면 문화적 충격과 맞닥뜨리게 된다. 지금까지 이런 음악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음악이다. 아라비아의 악기들이 자아내는 신비스러운 분위기, 피리의 신묘한 소리, 선율을 꺾고 늘이는 아랍-유대의 독특한 창법(두 문명은 중동의 같은 지역에서 생겨났다)이 경건하고 성스러운 가톨릭 음악(마치 그레고리오 성가와 같은)과 배치되어 서로 다른점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그 차이를 음미하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바라본 그라나다의 알 바이신 지구


동쪽의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라나다까지 대륙을 가로지르는 촘촘하고 방대한 음악적 고증과 통찰 그리고 스페인, 그리스, 불가리아, 터키, 시리아, 아르메니아의 연주자들을 불러 모아 연주/녹음한 스케일 등 어느 하나 평범한 것이 없는 음반이다. 서양의 클래식 음악에 익숙한 사람들은 동방음악의 또 다른 아름다운 면모에 깜작 놀랄 것이다. 조르디 사발의 프로젝트에 자주 참여하는 시리아 가수 와에드 부하순과 소프라노 로치오 데 프로토스의 서로 다른 창법을 듣는 재미도 이국적이다. 무어인들의 노래는 특히나 아라비아의 단조 선율에 더해진 감칠맛 나는 혹은 애절한 떨림과 꺾임 창법이 일품인데 우리 민요에서 노래를 떨고 꺾듯이 같은 아시아권인 아랍의 노래에서도 그런 창법이 나타난다. 화성의 구축보다는 선율의 신묘함을 중요시하는 동양 음악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특징은 플라멩코 음악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플라멩코 음악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이 자연스레 일어나게 된다. 스페인이라는 비단주머니에는 무엇이 더 들어있을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https://youtu.be/R3tXG8v5lLw

JORDI SAVALL, Bellaterra, 3 Abril 2016



https://www.youtube.com/watch?v=k8eeC-q1Z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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