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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텐 Sep 11. 2023

안달루시아의 잊혀진 음악을 찾아

8-15세기 '무슬림 스페인'의 음악

바로크 클래식 음악 


음반명: 미르테꽃의 정원 - 중동의 안달루시아 선율

연주자: 미셀 클로드(지휘, 타악기), 앙상블 아로마트(연주)

레이블: 알파 Alpha





프랑스의 지휘자이자 타악기 연주자인 미셀 클로드(michèle claude)와 앙상블 아로마트(ensemble aromates)의 음반 <미르테꽃의 정원 - 중동의 안달루시아 선율>은 중세 무슬림 치하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연주되던 이슬람 음악을 녹음한, 매우 희귀한 레퍼토리를 담고 있는 음반이다. 그중에서도 안달루시아 음악을 창시한 바그다드 출신의 음악인 지리압(Zyriab, c.789~c.857)의 곡을 담고 있다. 음반에 실린 12곡(1곡은 미셀 클로드의 오마주 성격의 창작곡)은 지리압의 음악과 그의 후계자들이 작곡한 음악으로 아라비아 특유의 리듬과 흥취로 서구 음악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지리압의 음악은 지금도 안달루시아 지방 및 플라멩코 음악의 뿌리를 이루고 있어 무슬림 스페인 시대의 중요한 예술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예술과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 존재했던 무슬림 왕국 알 안달루스(Al Andalus)의 역사이다. 스페인 남부 지역을 가리키는 '안달루시아(Andalusia)'라는 명칭도 알 안달루스(Al Andalus) 왕국의 명칭에서 유래했다. 8~15세기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우마이야드 왕조에서 시작해 마지막 그라나다 왕국까지 여러 무슬림 왕조와 국가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무어인으로 불렸던 북아프리카 지역의 무슬림(중동에서 온 아랍인 +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인)은 8세기경 서고트족이 지배하던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해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점령한다. 이후 15세기 가톨릭 세력의 국토수복 전쟁(레콩키스타)에 의해 마지막 무슬림 왕국인 그라나다가 멸망할 때까지 이베리아 반도는 중세 이슬람의 황금시대 문화 속에서 번영했다.


서기 750년경 우마이야  왕조 시대의 알 안달루스 영역. 스페인과 포르투갈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안달루시아 지방에 위치한 세 도시 코르도바, 세비야, 그라나다는 이 시기 가장 발달된 큰 도시였고, 우마이야드 왕조의 수도였던 코르도바는 동쪽의 바그다드와 함께 이슬람 문명을 꽃피운 도시였다. 중세 알 안달루스 왕국은 그 당시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보다 더 선진적인 학문, 정치, 사회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역사학자는 무어인들이 프랑크 왕국(현재의 프랑스)에 침입해 벌인 푸아티에 전투(732년)에서 패배한 사건을 두고 논평하기를, 중세 유럽이 선진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말할 정도로 그 당시 알 안달루스는 여타 가톨릭 국가들보다 뛰어난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 예로 안달루스 왕국에서는 거주민들이 세금만 내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될 정도로 관용적인 종교 정책이 이루어졌고 타자에 대한 공존의 정신이 사회 통합적 힘을 발휘해 유럽과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다양한 계층의 지식인들이 수도 코르도바로 모여들었다. 10세기경 코르도바는 인구 25만 명의 대도시로 당시 유럽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였고 약 40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대도서관을 보유해 동방의 바그다드와 함께 서방 이슬람 예술과 학문의 중심도시였다. 지금도 코르도바에 가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서에 주해를 단 이슬람의 대철학자 이븐 루시드(Ibn ʾAḥmad Ibn Rušd, 1126~1198)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의 동상은 코르도바의 선진적 학문 수준을 보여주는 상징적 징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와 토론하는 이븐 루시드(왼쪽), 15세기 베니스에서 인쇄된 아리스토텔레스 저서의 삽화


그러면 그 당시 최고 문명인이었던 무어인들이 연주한 음악은 어떠했을까? 그 음악들은 어떻게 스페인 지역 내에서 변화해 갔을까? 15세기 최후까지 무슬림 왕국이 존재했던 안달루시아 지역의 음악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스페인의 음악학자이자 지휘자인 조르디 사발(Jordi Svall)은 <그라나다 1013-1502>이라는 음반을 통해 안달루시아 지역에 공존하던 가톨릭, 유대, 이슬람의 음악을 역사적으로 고증해 음반으로 냈다. 음악적 고증이 뛰어난 이 음반을 통해 우리는 이베리아 반도라는 용광로 속에 녹아든 여러 문명의 음악적 유산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미르테꽃의 정원-중동의 안달루시아 선율> 음반은 유대와 가톨릭 음악을 제외하고 순수히 안달루시아의 아랍 음악만을 다룬 음반이다. 9-10세기 코르도바의 시인 이븐 압드 라비히(Ibn'abd Rabbihi, 860-940)는 그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는 원주민의 음악은 없었고 중동에서 기원한 음악이 곧 안달루시아의 음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그의 주장은 서고트족의 가톨릭 전례음악이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음악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신빙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아랍 음악이 안달루시아의 지배적인 음악이었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누가 중동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아랍 음악을 가져왔을까? 여기서 지리압(Zyriab, c.789~c.857)이라는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지리압은 아랍-안달루시아의 음악을 창시한 사람으로 음악 외에도 중세 무슬림 스페인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안달루시아 음악을 연주하는 '앙상블 아로마트'


지리압은 알 안달루스에 바그다드 압바스 왕조의 선진 음악을 소개하고 안달루시아 음악 전통을 다진 사람이다. 이 음반은 지리압과 그의 후계자들이 창작한 음악을 담고 있다. 지리압은 압바스 왕조의 5대 칼리프이자 <천일야화>로 유명한 하룬 알-라시드(Harun al-Rasid)의 바그다드 궁정에서 활동한 시인, 음악가, 가수였다. 이 당시 바그다드는 중세 문명의 중심지였고 하룬 알-라시드는 학문과 예술을 존중하는 군주로서 학자와 시인들을 궁정으로 불러 모으며 이슬람 문화의 최고 황금기를 이루었다. 8세기경 지리압은 바그다드의 궁정 음악가로부터 노래와 작곡을 배웠는데 궁정인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보아 음악적 재능이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압은 바그다드에서 활동하다가 북아프리카로 건너간 후 바다 건너 코르도바에 도착한다. 그는 바그다드에서 가져온 음악과 선진 문물을 안달루시아에 전했고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안달루스의 칼리프였던 압드 알 라흐만 2세(Abd ar-Rhman II)의 궁정에서 활동한다. 칼리프의 후원 아래 음악학교를 세워 노래와 음악을 가르쳤는데 단순히 바그다드의 음악을 전하는데 머물지 않고 새로운 음악 양식인 '나우바(nawba)'를 창작한다. 이후 나우바는 안달루시아 음악의 독창성이자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음악의 뿌리가 되었다.   


지리압이  현악기 우드를 들고 있는 필사본 (왼쪽) / 무어인과 백인이 우드를 연주하고 있는 13세기 필사본 (오른쪽)


나우바는 4개의 음악으로 구성된 모음곡 형식이다. 서주로 시작해 다양한 악기가 앙상블을 이루며 느리고 긴 리듬에서 가볍고 빠른 음악으로 진행하며 기악과 노래, 즉흥 연주를 적절히 혼합해 변화해 가는 음악이다. 이 음반의 구성도 나우바 형식에 따라 첫 번째 곡은 서곡으로 아랍의 여러 음계 중에 <나와 아싸르 nawa athar>라는 음계를 제시하며 시작한다. 서곡에 이어 등장하는 각 11곡은 무왓샤하트(muwashshah) 양식이라고 불리는 곡으로 4-5명의 연주자가 우드, 케반, 카눈, 북 등 아랍의 악기를 연주하며 시적인 가사를 섞어 연주하는데 이 음반에서는 노래 없이 기악연주로만 구성했다. 무왓샤하트는 음악 양식이지만 동시에 시문학 형식이기도 해서 각 곡의 제목이 매우 서정적이다. <미르테꽃의 정원>, <검은 눈동자>, <너무 긴 밤>, <내게서 멀어지며>, <관능적 접근> 등 당시 무왓샤하트 시가 애정의 내용을 많이 다루었듯이 음악의 제목 역시 사랑의 내용을 암시한다. <날카로운 검>, <선술집의 가수>, <취기>는 당시 무어인들의 일상생활을 담은 친근한 소재의 음악으로 보인다. 또한 아랍-안달루시아의 음악에서 리듬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서양음악이 화성으로 구조를 쌓아올리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아랍의 음악은 변칙적이고 다채로운 리듬 변화로 흥겹게 흘러가는 선율의 자연스러움에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나우바'라는 모음곡을 구성하는 '무왓샤하트'라고 불리는 각 개별곡은 모두 특유의 박자와 리듬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속도와 강약의 다이내믹 등 신묘한 기운의 음악을 들려준다. 서구 음악에 익숙한 우리에겐 매우 이국적으로 들릴 수 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아랍의 발현악기 우드(oud)가 서양악기 류트의 뿌리가 되었듯이, 나우바 형식은 서양음악의 모음곡(suites) 형식에 영향을 주었다. 여려가지 춤곡을 한데 묶어 연주하는 모음곡 형식이 서양음악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 프랑스였다. 모음곡 형식은 곧 전 유럽으로 퍼져 바로크 시대에 유행의 절정을 맞는데 음악학자들은 그 기원을 지리압이 주도한 안달루시아 음악 '나우바'에서 찾고 있다. J.S.바흐의 걸작 <무반주 첼로 모음곡>, <프랑스 모음곡>, <영국 모음곡> 형식의 원류가 아랍 문화권에서 왔다고 생각해보면 동서 교류의 유구한 역사에 상상력이 무한히 뻗어나갈 따름이다.


우드를 연주하는 바야드, <바야드와 리야드>라는 안달루시아 문학의 한 장면을 그린 삽화, 12세기


지리압은 음악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바그다드에서 가져온 패션, 음식, 유리, 라이프 스타일 등 선진 문물은 이베리아 반도에 전해져 중세 유럽 문명에도 영향을 끼쳤고, 코르도바가 유행과 문화의 중심 도시가 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그의 음악은 그의 사후에 스페인 내외의 다양한 문화집단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집시의 플라멩코 음악, 북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까지 지리압이 남긴 음악의 흔적을 광범위하게 찾아볼 수 있다. 라틴 리듬의 경쾌함은 어느 면에서 중동의 리듬과도 닮아있는 지도 모른다.


안달루시아 음악은 1492년 가톨릭 세력이 그라나다 왕국을 함락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을 때 그 전성기가 끝났다. 지리압의 음악은 안달루시아에 남은 소수의 무슬림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로 전승되어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어떤 학자들은 지리압의 음악이 안달루시아에서 북아프리카로 일방적으로 전수된 것이 아니라 같은 문명권인 두 지역이 상호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동일한 형식의 음악이 성립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그다드에 견줄 만큼 문화의 황금시대를 꽃피운 아랍-안달루시아의 '소프트 파워'를 간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음반의 특이한 점. 지휘자 미셸 클로드는 안달루시아의 음악을 100% 아랍 악기로 연주하지는 않았다. 바이올린, 플루트, 콘트라베이스 등 서양악기도 섞어서 사운드의 양감을 구성했는데, 주선율의 무드를 이끌어가는 것은 네이와 같은 아랍의 피리, 다프나 자르브와 같은 아랍의 타악기이다. 중세 코르도바의 유행 속으로, 칼리프가 통치하는 궁전으로, 무엇보다도 알함브라 궁전의 정원 속으로 여행을 떠나기에 부족함 없이 아름답고 충만한 음악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ka-PgzKY1I&list=OLAK5uy_noBjJp0sHQ2ZpismxlKw6eN-glvNDscCk


https://www.youtube.com/watch?v=Q_zemC20Yu8


https://www.youtube.com/watch?v=zTXnnvy8e5Y&list=OLAK5uy_noBjJp0sHQ2ZpismxlKw6eN-glvNDscCk&index=5


 https://www.youtube.com/watch?v=yc27_bIfcxs&list=OLAK5uy_noBjJp0sHQ2ZpismxlKw6eN-glvNDscCk&index=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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