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가 바뀌었다. 어색하고 형식적인 인사가 오간다. 감사한 마음은 없지만 감사하다고 말하고 서운하지 않지만 서운하다고 말했다. 20년을 앞둔조직생활인데도 인사이동은 익숙하지 않다. 매번 거추장스럽고 낯간지럽다. 새롭고 신선한 것을 기대하는 그들의 표정이 금세 딱딱하게 변할 거라는 걸, 에둘린 비난과 날 선 평가를 쏟아내며 차가워지고 말 거라는 걸, 짐작하고야 만다. 반가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을 웃음 뒤에 숨기느라 얼굴이 굳어진다. 조직의 중심에 연결되어 있다는 소속감도 내 안의 잠재력을 키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도 사라졌다. 어떤 일에도 나서고 싶지 않다. 큰 탈없이 편안하고 한가로운 상태로 머물고 싶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일에 욕심을 내었다. 조금 무모했고 욕심이 앞섰다. 일에 성과를 내면서 가정을 지탱하기 어렵고 아이들을 돌보면서 팀원들을 살피기 힘들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빈틈없이 꽉 채운 숨 가쁜 하루였다. 매일 그렇게 살면서 여유로울 수는 없었다. 일하고 살림하면서 사는 게 전부인 메마르고 건조한 일상이 되어갔다. 선량한 배우자의 도움과 지지만으로는 버거웠다. 열심히 일한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라던 그의 말은 현실이었다. 미련하고 오기에 찬 분투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진심과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것들이 숱하게 널려있었다. 세상은 일하는 엄마에게 엄격하고 친절하지 않았다. 그것을 통과하려 애쓰다 그만 지치고 말았다. 그런 내가 나약해서 용납하기 싫었고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몸이 더는 버티지 말라고 호소했다.
스파링 휴식시간,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쉴 새 없이 흐르는 땀을 식히고 있었다. 무심히 남자 수련생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몸을 부딪히며 싸워 본 적이 있던 것처럼 처음이 아닌 것처럼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개인적인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남자들의 스파링은 내 것과는 달랐다. 완벽히 밀착되어서 서로의 몸과 힘을 겨루면서 하는 싸움,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하고 차가운 표정, 처음인데 처음이 아닌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몸을 던져서 힘을 겨루고 틈을 노리고 공격을 하고 상대와 부딪히고 얽히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남자들은 어릴 때 한 번쯤 싸우기도 하나? 싸우면서 배우나? 싸움기술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나? 싸우는 남자는 타고나는 건가? 어떻게 저들은 저렇게 쉽지? 자연스럽지? 나는 왜 저렇게 안 되지? 가지지 못했고 가질 수 없었던 남성을 욕망하는 나를 발견했다. 시기와 갈망을 넘어선 분노가 찾아왔다. 그들은 쉽게 쟁취하고 소유하는 것을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배워야 하지? 욕망하고 애써야만 얻을 수 있는 거지? 그곳에서 나는 조직의 중심부를 노려보는 사람처럼 그들의 주변을 맴돌며 선망하는 사람이었다. 중심을 원하지만 중심에 닿지 못하는 현실, 그런 나를 저주하고 자책하며 주눅 들어버린 현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조직과 체육관에 공통점이 있다면 권력(유급자 벨트)을 소유한 사람들은 주로 남성이라는 것이다. 소수의 남성이 직장과 체육관 조직의 상부를 차지한다. 직장에서도 관리자에 속하는 과장급 여성은 적다. 체육관에서도 퍼플이상의 여성 유단자는 적다. 그 속에서 소수의 여성은 권력을 가지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온 힘을 다해서 지치지 않고 조직의 상부로 올라간 여성은 전설이 된다. 남성 상급자들은 일하는 여성에게 아이에 대해 질문한다. 세상은 급속도로 변하지만 이 조직은 몇 년째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아이의 수와 성별과 연령이 업무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비슷한 질문과 그보다 더 진부한 답변이 오간다. 직장에서 유자녀 여성에게는 아이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업무능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엄마라는 역할을 절반쯤 걸쳐 입은 채로 일을 한다. 쓸데없는 질문과 호기심으로 일하는 사람을 아이가 있는 여자로 묶어서 머뭇거리게 한다.
진짜 싸움은 엉겨 붙어서 하는 것이다. 부럽다면 따라 하면 될 일이다. 남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동안 그것이 그들만의 전유물이었다면 어설프지만 이제는 나도 할 수 있다. 싸움을 하며 엉겨 붙어 있는 여자가 익숙하지 않아서 낯선 것뿐이다. 아무도 나에게 여자는 싸워도 된다고 허용하지 않았다. 한 번쯤은 맞거나 때리고 와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성별에 얽매여 경험을 제한당했다.정숙과 정절과 조신함이라는 틀에 갇혀서 얼마나 많은 것을 제한당했던가?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서 이기려하는 여자는 곤란하다고 했다. 금지된 싸움을 철없는 남자아이들이나 하는 장난쯤으로 얕잡아 보았다.성인이 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가 성별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사회적인 규율에서 살짝 벗어나는 일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된 중년이다.
어쩌면 이 싸움은 나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여성에게는 가혹하고 엄격한 사회에서 불공평한 결혼과 육아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쌓인 분노를 매트에 던져버릴 수 있다.아이를 맡아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경력을 유지할 수 있고, 결혼과 출산과 육아의 무한의 굴레에서 사회의 저편으로 쫓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세상에서,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는 손은 여전히 엄마의 것이라는 왜곡된 시선에서, 자녀가 있는 여자에게 승진이 오히려 불리한 현실에서, 아이가 잠들고 서야 체육관으로 향하는 나는, 그 모든 쓸쓸하고 야속한 것에서 태연해지려고, 더 이상 작고 나약한 존재가 되지 않으려고 엉켜 붙어 싸운다.
그랄(승급하기 전에 같은 벨트 내에서 위치를 나타내는 등급, 보통 1-4 그랄)을 얻었다. 승급식을 구경하다가 내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듣고 어리둥절하게 관장님 앞에 섰다. 하얀 띠에 흰색 테이프를 둘러주었다. 1 그랄 한 줄이 생겼다. 뜻밖의 행운이었다. 매일 체육관을 찾아오는 소심하고 어수룩한 아줌마를 응원해 주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싸워본 적이 있었던가? 등과 허리가휘어질 듯 아리고 온몸이 저릿해오는 통증에 잠 못이루면서도 싸우려고 맹렬하게 달려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지지 않으면 이길 것이다' 브라질 주짓수의 창시자 엘리우 그레이시가 남긴 말이라고 한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해서 하는 싸움이라니 소심쟁이, 겁쟁이, 극내향형 인간인 나에게 딱 알맞은 싸움이다. 오늘도 깔리고 버둥대다가 끝나겠지만 매달릴 것이다. 이것이 억압되고 억눌린 나를 되살릴 수 있을 거라고, 흐려지는 나를 세우고 본래의 자신을 되찾게 해 줄 거라고, 잃어버렸던 승리의 감각을 되찾아줄 거라고 믿으면서, 계속 싸워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