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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뒷면 Jan 02. 2023

살림이라는 굴레

오늘도 그것이 고민이다. 매일을 고민한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은 무엇으로 할까? 점심을 먹고 나면 저녁은 무엇으로 할까?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먹을까? 고민하지 말라던 성경 말씀은 현실과 다르다. 인간은 한 끼 밥 앞에서 번민하고 주저한다. 먹고 먹고 먹다가 해가 저문다. 삶이 밥으로 채워져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먹는 것이 생의 즐거움 중 하나라만 내가 만든 것이 아 때가 그렇다.


30년 동안 어떤 수고도 하지 않고 그 많고 많은 따뜻하고 맛있는 한 끼를 대수롭지 않게 수저만 들었다 놓았던 것을 후회한다. 하루에 세 차례나 되는 밥상을 위해 마음 졸였던 어떤 늙은 여인의 긴 한숨이 이젠 내 것이 되었다. 그녀의 수고를 먹고 자라나서 그녀와 같은 수고를 하고 있다. 이것은 여자로 태어나 엄마가 된 여성에게 지워지는 굴레이자 모든 시대를 거슬러 여성에게 대물림되는 구속인가?


'엄마 오늘 밥은 뭐야?설레는 듯 달뜬 목소리로 묻는 아이를 볼 때마다 말문이 막힌다.'방금 점심이었는데 벌써 저녁때구나.' 아이의 말은 내게 밥때를 알리는 알람처럼 들린다. '어서 밥상을 차리세요. 시간이 되었습니다. 띠띠띠 ' 나는 가족들의 끼니를 책임져야 할 주부이자 그것에 유로울 수 없이 얽매인 인간인 것을 확인한다. 엄마의 손맛이 담긴 음식을 먹고 싶은 성장기 입맛을 탓할 수야 없다. 그렇지만 그냥 대충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 딱히 근사하게 만들 줄 아는 음식이 많지도 않다. 무슨 특별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백종원처럼 솜씨가 좋아 뚝딱하고 한상이 차려지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뭘 먹어 할지 나도 모르겠다고 실은 먹고 싶은 마음도 없고 모든 것이 귀찮다. 냉장고 문을 열고 재료들을 조합하며 밥상을 구상한다. 때로는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고객의 평점에 울고 웃는 사장님이 된 기분이다. 세상에서 제일 까다로운 고객이다. 요리 동영상을 보고 꾸준히 익혀서 고객의 입맛을 사로잡을 비법을 개발해야겠다. 일단 오늘 저녁은 밖에서 고 생각해 보겠다.


밥상만 그런 것이 아니다. 뒤돌아서면 늘 그대로인 듯한 것이 살림이다. 어제 세탁해서 뽀송해진 상태로 각지게 개어놓은 옷과 수건도 오늘은 빨래통에 구겨진 채로 처박혀있다. 반짝이고 뽀독이던 세면대와 부엌 개수대도 하루 이틀만 지나면 뿌옇게 변한다. 한 사람이 하루를 지속하며 지나간 흔적들이 실은 무엇인가를 더럽히고 흩트리는 결과가 된다. 인간과 삶은 그렇게 거창하고 위대한 것들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순식간에 사라질 음식을 분주히 차려먹고 금세 더럽혀질 옷으로 몸을 단장는 일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마룻바닥의 먼지, 샤워부스의 물때, 침대에 걸쳐진 젖은 수건, 뒤집어진 바지, 바닥을 뒹구는 양말 한 짝, 흘려놓은 음료수 얼룩, 조각나버린 과자 부스러기가 내 쓸모의 전부인 것 같아서 울컥하는 마음이 솟구친다. 왜 그것들은 나의 눈에만 크게 보이는 것일까? 미친년 널뛰기하듯이 집안에서 온종일 부산스럽게 움직여도 생동하는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증명하며 만들어낸 온갖 흔적들은 엄마의 평화를 방해하고 깨뜨린다. 이 모든 허드렛일에서 영영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것만 같고 그럴 수 없을 것이 너무도 뻔해서 환멸감을 느낀다. 종일 바쁘게 일하다 집에 와도 쉴 수 없는 신세라니 어쩌다가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일까?  


아이들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엄마가 낮에 가정에 없다는 현실을 아이들이 크게 느끼는 때이다. 대부분은 일과에 쫓겨 집안일은 잊어버리지만 학기 중과 방학은 엄연히 다르다. 아이들은 학교의 울타리가 아니라 보호자가 없는 집에 머물고 있다. 집에 혼자 있게 된 아이는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한다. 목소리를 확인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초조하다. 예고 없는 초인종에 긴장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문 뒤에 숨어서 전화를 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아이를 혼자 집에 두었다는 죄책감이 찾아온다. 


게다가 끼니는 배달음식이나 편의점 도시락으로 해결해야 했다. 미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가정으로 배달되는 도시락을 찾아보았다. 가정으로 보내는 정기배송은 어렵다는 답변을 되풀이해 듣고 나니 울화가 치밀었다. 도시락 집에 전화 돌리다 넋이 나갔다. 점심때를 놓치지 않으려면 일하면서도 시간을 자주 확인해야 했다. 우리 집 편의점에 담아 둔 도시락 약속시간을 잊으면 찾을 수가 없다. 업무를 보다가 점심 주문을 놓치게 되면 기다리다 지친 아이들이 울상을 짓는다. 이럴 땐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먹는 게 아니다. 돌 씹는 기분이다. 점심시간 시작 10분 전에 먼저 일어나 아이들 끼니를 챙기고 10분 늦게 복귀하기도 했다. 업무 집중도 떨어지고 동료들 눈치가 보였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점심시간을 내 맘대로 쓸 수는 없었다. 정리하지 못한 아이들의 방학 식단을 퇴근 후에 정리했다. 일단 이번주는 해결되었으니 다음 주 식단은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방학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피곤이 쌓인다. 


남편에게 말해봐야 "어쩔 수 없지 뭐. 이젠 애들이 알아서 챙겨 먹을 때도 됐잖아" 하곤 남일 얘기하듯 대답할 것이다. 이 남자의 유체이탈 화법은 나를 미치게 한다. 울화통이 터져 초점을 놓치고 일이 꼬여버리고 만다. 친정엄마는 돌봄 조력자가 아니다. 유아기에 큰 아이를 돌봐 준 것으로 더는 못하겠다 으니 손 내밀  다. 매달려봐야 내 마음이 병들 것이다. 광고에서는 전화 한 통이면 우리 아이 돌봄 걱정을 덜어줄 이모님이 나타나지만 월급의 절반이 사라진다. 현실 육아는 엄마가 해결해야 과제다. 


퇴근해 돌아오면 먹고 난 흔적이 집안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도시락, 라면, 먹다 만 빵 봉지, 부스러기만 남은 과자봉지들이다. 울컥하다가도 혼자서 끼니를 해결한 어린 마음이 생각나서 삼켜버렸다. 일하는 엄마로 사는 것이 한층 버거워지는 방학이다. 아이들이 아플 때와 방학 때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갑갑함이다. 이 정도 육아 경력이면 무던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매번 새롭다. 육아는 나를 강인한 여자로 단련시킨다.


호박을 자르며 부딪히는 도마의 맑게 울리는 탕탕거림과 올리브 오일에 노랗게 익어가는 고등어의 지글거리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아삭 거리는 고추의 상큼함과 보글보글 입안을 한껏 덮여주는 된장의 뜨거움을 가만히 입에 담아본다. 방금 건조기에서 꺼낸 빨래의 비릿하고 신선한 냄새가 상쾌하다. 맛있게 먹으며 한 그릇을 금세 비워낸 아이의 뿌듯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처박고 김에 밥을 야무지게 싸 먹는 막내를 보며 내 손을 거쳐간 재료들과 양념의 순서를 되새긴다. 간소한 밥상에 담긴 온기를 느끼며 이것이 아이들을 살리는 일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진출처: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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