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을 쌓지 못했다.” 그리고 ‘퍼포머’ 작가를 검색하니 다음과 같은 소개가 눈에 띈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가진 소설가다. 물이 얼어 얼음이 되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기록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중략… 그는 때때로 놀라울 정도로 관조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자기 자신을 풍경처럼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한은형일 것이다.” – YES24 작가 파일 中.
과연 소개 글처럼 이야기의 서술 방식이 마치 관찰 카메라 워킹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멀리서 촬영하듯, 독자로 하여금 거리를 두고 대상을 지켜보게 하는가 하면 줌인하여 행동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만들기도 하고, 아주 가까이까지 밀착하기도 하지만 카메라가 사람 속까지 찍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듯 깊은 묘사에는 한계를 두고 있어, 크게 선정적이지도 그렇다고 무관심 하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감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작가의 이런 시도 덕에 레이디를 그저 한 특이한 개인으로만 보려는 안일한 시도는 잠시 내려놓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 바라보게 된다.
작가는 두가지 키워드로 레이디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 하나가 “운을 쌓지 못했다”라는 레이디의 독백에 드러난다. 주목할 건 운이 ‘없었다’가 아니라 운을 ‘쌓지 못했다’이다. 운을 기대하며 로또를 긁거나 ‘힘겹게 노력 했고 이제 운만 따라준다면..’ 같은 막연한 ‘운’ 그것이 아니라, 운이란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야 하는 것으로, 공들여 관계를 만들고 시간 들여 인연을 쌓듯 그렇게 쌓는 것이며, 그 쌓여진 운이 인생이란 빈 곳간을 채우는 것인데 이것을 쌓지 못한 것이 레이디의 실책이라고, 작가는 레이디의 입을 통해 자백하게 만든다.
두번째로 눈에 띈 키워드는 ‘퍼포머’이다. 호모사케르란 단어를 빌자면, 이는 주권세력에 의해 변방으로 밀려나 주권을 박탈당한 존재를 일컫는다. 잊혀진 자, 보이지 않는 자로서 ‘헝그리 보이’나 ‘레이디 맥도날드’의 위치는 호모사케르의 위치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소설의 묘사에 따르면 주류세계에서의 자신들의 위치는 없을 지 언정 자기 자신에 대한 위치감각만큼은 자각하고 행사하고 있어서 단지, 박탈당한 자인 수동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존재로서 퍼포머의 자리에 이들을 위치시킨다.
다시 되짚자면, 호모사케르라는 상징적 존재는 주류사회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존재로써 체제밖의 내쳐진 상태에 대한 공포, 경각심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퍼포머는 자신의 퍼포먼스로 주류사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다. 길에서 생활하지 않는 비노숙인의 삶, 안전한 주류 사회의 삶이란 무엇인가. 레이디는 집은 없지만 품위와 자존심을 잃지 않음으로써 퍼포먼스를 행한다. 반면 주류사회 구성원들은 안전을 담보 받아 길 밖에서 살고 있지만 그 대가로 무엇을 주류사회에 내어주었는가. 이런 대비가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소설 속 ‘헝그리 보이’와 레이디는 이런 류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퍼포머’란 명칭을 달아주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퍼포머의 위치를 좀 더 강조하고 부각시켰다면 레이디의 인생에 무언가 우리에게 주는 경각심이나 메세지를 더 환기 시킬 수 있었을 것이지만, 작가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옮겨가지는 않는다. 그저 주류에서 빗겨난 일탈된 인생이 아니라 하나의, 일종의 퍼포먼스는 아닐까?하는 질문을 독자에게 던져주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열명의 사람이 있으면 열명의 저마다 다른 인생들이 있다고 쉽게 수긍하지만 시스템의 입장에서보면 그저 하나의 인생일 뿐이다. 열명이든 백명이든 천 아니 그 이상이든. 모두 똑같은 사회의 시계를 차고 같은 시간 속에서 결만 조금 다른 같은 목표의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 이 시스템에서 벗어난 자의 삶에서만 이런 시스템 밖에서 관망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퍼포머의 역할인 것이다.
극적인 메세지, 감흥, 통찰을 주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레이디의 일상을 카메라 쫓듯 쫓다 보니 시스템 밖에서 존재하는 캐릭터를 통해 잠시나마 카타르시스를 맛본 것만은 사실이다.
Ps. 책을 덮고 드는 의문이 하나. 소설이라 하지만 찾아본 바에 의하면 이름만 바꿔 썼을 뿐 거의맥도날드 할머니의 실제 일상, 실제 인터뷰 내용과 다를 것 없는 논픽션 아닌가. 고인을 다시 돌아본다든가, 고인을 기린다든가 본문에 적혀있긴 하지만 이렇게 다뤄줘도 되는 건가. 그저 ‘궁금한 이야기’의 확장판에 지나지 않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