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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제시 Oct 17. 2022

밥은 잘 먹고 지내니?


어처구니없지만, 평생 없던 빈혈이라는 기분 나쁜 어지럼증이 심해지기 시작하더니..

아침에 눈을 뜨면 천장이 빙빙 돌았고 화장실에 가려고 침대에서 일어나면 휘청거려, 큰 맘먹고 등록한 헬스는커녕 집 앞 산책도 못 나가는 지경까지 왔다.


요 며칠 홈스테이 식단이 부쩍 부실하고 빈약해지고 있다고 느낀 참이었다. 이상하리만큼 육류 섭취를 피하고 샐러드나 각종 파스타류, 아니면 곡물 빵 쪼가리를 주식으로 먹는 호스트 부부를 보며 '뭐지?' 싶었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도 물어 봐주고, 따로 수제 버거나 피자도 만들어주며 챙겨주려 했던 모션을 취했기에, 솔직히 크게 문제라 생각 안 했다. 그들이 어떤 소신을 가지고 있던, 내 밥만 잘 챙겨주면 되는 거니까.





그렇다, 내가 머물고 있던 홈스테이 가정은 소식주의자에 더해 베지테리언이었던 거다. 


그렇게 한 달이 넘었나? 음식의 양은 점점 더 줄어들었고, 다이어트식을 방부케 하는 샐러드나 칠리 빈 스튜 따위의 밥상이 며칠째 이어졌다. 저녁을 먹어도 배가 고프니 새벽에 몰래 컵라면을 끓여 먹기도 하고, 꼼 쳐 놓았던 초코바나 에너지바를 먹으며 주린 배를 채우고 잠에 드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쉽게 없어지지 않는 빈혈과 이런 상황에서 눈칫밥 먹으며 지내야 하는 날들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았다. 상황을 잘 아는 동료들은 왜 그걸 참고만 있냐며, 싫은 건 싫다, 이러이러한 게 좋다라고 네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그들은 모른다고. 만약 집주인이 말을 듣고도 도통 변화의 모습으 보이지 않는다면, 그땐 집을 나감녀 그만이지 않냐고 조언해줬다. 


듣고 보니 맞았다.


물론 외국 문화 경험해보겠다고 홈스테이를 택했던 것도 맞지만, 한국 돈으로 무려 80만원 가량을 지불했다. 적지 않은 돈이기에 입주하는 입장에서 그만큼 기대하고 요구할 수 있는 게 당연한거 아닌가?  





결전의 날. 혹시라도 내 서툰 영어가 그들에게 무례하게 와닿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대본 아닌 대본까지 만들고는 오전 내내 할 말들을 정리했다. 


일을 마치고 평소와 같이 소박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설거지 중이던 홈맘 뒤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심호흡을 크게 한번 내뱉고는 말을 걸었다. 할 말이 있다고.. 따듯한 허브티 한 잔을 들고 거실로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잡다한 상념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어떤 표정으로 말을 시작하지? 기분 나빠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더듬더듬, 하지만 준비된 말들을 천천히 내뱉는 나의 말을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듣던 그녀는 곧 남편 Kal을 부르더니 약간의 격양된 목소리 톤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빠르게 주고받더니 싸늘하게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이번 기회로 관계를 확실히 잡겠다는 듯이 그동안 내가 했던 행동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기 시작했다. 홈스테이에 살면 조리기구를 쓰면 안 되는데 봐줬다는 둥, 식사할 때 쩝쩝 소리 내는 건 얼마나 매너 없는 행동인지 아냐는 둥, 일 끝나는 시간이 너무 늦어 밤에 물소리로 시끄러웠다는 둥, 너무 많은 불만들을 쏟아내어 못 알아들은 게 반이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며 반박 한번 제대로 못하고 있는 내게 그들은 마지막 직격타를 날렸다. 앞으로 키친의 모든 주방기기들을 터치하지 말라고.


좋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내심 기대했던 내 생각이 큰 착오였음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어이가 없음을 넘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나를 짓누르려 하는 그들이 너무 무서웠다. 지네 멋대로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쌩하니 2층 방으로 들어가는 그 둘을 바라보며 홀로 방으로 돌아왔다. 또르륵..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지더니 이내 걷잡을 수 없이 흐르기 시작해 얼굴을 감싸고 엉엉 울었다. 타이밍 좋게 울리는 엄마의 안부 카톡에는 괜찮은 척, 더 좋은 집 알아보면 되는 거니 걱정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이라도 한국에 돌아가 엄마 품에 안겨 그간 쌓아왔던 울분과 설움을 쏟아내고 싶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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