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희가 어렵게 검정고시를 치르고 편입한 고등학교는 온양시내도 아닌 외곽에 있는 고등학교였는데, 간신히 들어간 학교도 퇴학을 당한 철희는 엉가에게 부끄러운지 집에 들어오질 않았다. 미술학원도 가지 않고 며칠째 집에 오질 않는 철희 때문에 방개와 기환은 이곳 저것 불량배들이 돌아다니는 골목이나 술집을 찾으러 다니기도 했지만, 철희는 도통 온양 시내에서는 보이질 않았다. 방개의 근심걱정 소리에 엉가와 덕구 조카들도 내심 마음이 쓰이는지 집안 분위기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그때 엉가가 가만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골똘한 표정을 짓더니 커다란 도화지를 꺼내서 붉은 크레파스를 들고 그 위에다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엉가는 분명히 철희가 밤에는 집 근처에 왔다 갈 수도 있다며 각자 철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서 대문에 붙여두자고 했다. 방개도 그 말에 무슨 효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자고 하고 먼저 방개가 한 줄을 쓰고 또 엉가가 한 줄을 쓰고 덕구 조카들이 쓰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환이 한 줄을 썼다.
맨 먼저 엉가가 한 줄을 썼다.
- 철희야 난 널 보면 환하게 눈부시게 웃어 줄 거야. - 엉가
- 철희야 네가 걱정하는 오토바이 값은 내가 다 치렀다. 넌 집에 들어오기만 해라. - 방개 아저씨
- 철들면 좋으련만 그래도 넌 우리 가족이니까 사랑해. -
- 미안하면 후딱 들어와라. -
- 철희야 일찍 들어오면 영화배우 단역으로 널 쓸까 생각 중이다. - 기환 아저씨.
대문 앞에 가로등이 켜져 있으니 웬만하면 밤에도 글씨는 잘 보일 정도로 크게 써 서 대문짝에 종이를 붙였다. 낮에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한 줄씩 읽고 가거나 아니면 밤에도 읽고 가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래도 그 종이를 붙이고 나서 열흘이 지나니 꾀죄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철희가 밤에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때 철희를 보자 제일 환하게 웃으면서 환영해 준 사람은 뜻밖에 엉가였다. 철희는 마루에 서서 하얀 레이스 블라우스에 푸른색 치마를 입고 있는 엉가의 모습을 보자 그동안 자신이 다시는 이런 삶을 살면 안 되겠다는 결단이 섰다. 그 이유는 엉가가 봄밤에 핀 벚꽃처럼 아름답고 눈부시고 환하게 자기를 보고 웃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철희의 가슴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심장소리를 내며 쿵쾅쿵쾅 거리며 밤새도록 엉가의 문 앞에서 뛰기 시작했고, 철희는 그 날밤 자기 인생의 가장 결단을 내렸다.
"난 엉가의 저 아름답고, 눈부시고, 환한 웃음을 내 모든 걸 걸고 얻어낼 거야. 그러려면 난 미술에 미쳐야 해. 그림에 미치면 학벌에 상관없이 화가가 될 수 있다고 뻥 쩍 빨 화가 선생님이 말했으니까, 난 다시 서천에 내려가서 뻥 쩍 빨 선생님께 그림을 배워서 화가가 되어야겠어."
철희의 결단은 빨랐다. 그리고 방개도 납득이 가는 일이라서 방개는 철희를 데리고 다시 뻥쩍뻘의 화가에게 찾아갔다. 장항선 끝 즈음에 있는 서천역까지 둘은 다시 먼 길을 기차로 달렸다. 방개가 철희를 위해 쓴 돈은 뜻밖에 철희의 오토바이 절도에 관한 얘기를 듣고 덕구가 철희가 물어 줘야 할 돈을 가지고 왔다.
덕구로써는 늘 방개에게 미안하고 그랬던 터에 큰 맘을 먹은 모양이었다. 천안에서 건물 사장이 된 덕구는 부동산으로 워낙에 큰돈을 벌어놔서 인지 철희한테 필요한 돈이 있다면 자기도 돕겠다고 나섰다. 고아로 살아온 덕구도 철희의 처지가 딱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방개도 그에 돈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고, 덕구의 너그러운 마음에 오히려 방개는 큰 감동을 받은 것이었다.
방개는 철희를 구해주기로 맘을 먹었기에 철희를 위해 덕구의 호의도 받아들였고, 자신이 모아두었던 돈까지 다 털어서 철희를 끝까지 밀어주기로 했다. 이제 철희도 자신의 아들이나 진배없었기에 방개는 철희에게 간곡한 부탁을 몇 마디 했다.
"철희야, 네가 화가가 되는 것보다 아저씨는 네가 사람이 되길 바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건 제일 중요한 거야. 그러려면 네가 기분 내키는 데로 살면 안 되는 거야. 이제는 네가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면 그걸 그림으로 다 해소해 봐, 마음이 힘들 때 가장 오래도록 그림을 치열하게 그려봐."
방개는 철희의 아프고 시리고 고통스러운 마음도 알았다. 이 험한 세상에서 일찍이 고아로만 살아온 철희가 세상을 얼마나 원망하는지도 알았다. 그리고 그에 마음에 늘 허풍선처럼 그냥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원인 모를 슬픔이나 동생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들이 얼마나 애절할지도 알고 있었다.
기차에서 철희는 방개에게 한 가지만 물었다.
"아저씨, 나 나중에 진짜로 유명한 화가 되면 엉가랑 결혼해도 될까요?"
"그럼 당연하지, 엉가만 좋다고 하면 나야 반대할 이유가 없지. 너든 누구든.
나는 우리 엉가 진짜 사랑하는 남자면 합격이지. "
"아저씨가 엉가 아버지 잖아유, 그런디 저 같은 불량 배도 나중에 잘 도기문 결혼 허락 해주신다는 거지요.
진짜 아저씨 약속하시는 거지요, 그럼 저 정말 진짜 화가 돼서 엉가한테 나타날꺼유, "
방개는 철희의 번뜩이던 날카로운 눈빛이 어딘가 사그라지고,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가진 순하고 밝은 밝은 눈빛으로 돌아올 날이 멀지 않은 것을 그날 철희의 얼굴에서 보았다. 서천역으로 달리는 장항선 완행열차에서 방개는 철희에게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사주면서 그에 마음도 다시 봄바람처럼 포근해졌던 것은 바로 그런 철희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고, 뻥 쩍빨의 화가에게 하숙비와 수업료를 두둑이 챙겨주고 올라오는 길에도 방개는 그저 봄바람이 설렁설렁 기차 차장을 흔드는 것이 마냥 좋기만 했다.
뻥 쩍빨의 화가는 엉가엄마 윤희를 사랑하고 그녀와의 짝사랑에서 큰 영감을 얻었는지 그림이 무척이나 깊어지고, 예전의 그림에 비해서는 훨씬 깊이가 있는 그림들을 많이 그려놓았다. 그리고 철희가 엉가를 좋아한다고 하자, 빙그레 웃더니 철희를 자기 집에서 하숙하는 것을 허락하고 다시 철희를 제자로 받아 주었다. 뻥 쩍빨의 화가는 철희가 화가로 가진 숨겨진 재능을 결국 자신이 꺼내서 빛을 발하게 해 주어야겠다고 방개에게 넌지시 희망에 찬 말을 해 주고는 방개를 보냈다. 방개는 윤택과 젊은 전도사를 만나고 싶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허투루 어디선가 잠을 자고 다닐 처지가 아니라고 하며 철희만 맡겨두고 조용히 서천을 떠났다.
철희때문에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나서 방개와 기환은 다시 이순신에 몰두해 갔다. 방개는 성웅 이순신 시를 쓰고, 기환은 영화 각본 쓰는 일에 미쳐있다시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