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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길주 Apr 09. 2024

가벼이 움직이지 말고 산같이 정중하라.




 기환은 이순신에 관한 존경과 경외감이 클수록 각본을 쓰는 일이 점점 무겁고 힘이 들었다. 자신이 연출까지 생각하고 쓰는 각본이라서 그리고 처음 쓰는 각본이고 연출이다 보니 심중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초고를 고치고 다시 수정하기를 몇 번씩 해도 진도는 쉽게 나가질 못했다. 철희때문에 있었던 한바탕의 소동이 끝났지만 방개는 쉽게 아이들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중요한 때에 아이들이 조그만 탈선을 하거나 정신을 다른 곳에 팔면 그 아이의 장래가 어떻게 망가질지 모른다는 책임감이 방개에게는 컸다. 그래서 기환과 만나는 시간도 줄이고 방개는 주로 집과 온양장과 현충사에 일주일이 한두 번 왔다 갔다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일은 일체 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 엉가나 덕구의 조카들이 공부를 하는 시간에는 꼬박 그도 앉아서 책을 보거나 영어공부를 했고, 시를 쓰는 일에 집중을 했다. 그러나 기환은 영화의 각본이 나오질 않으면 현장 취재를 주로 다녔다. 기환은 이순신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 이순신이 활동한 무대를 샅샅이 조사를 하고 경상도 전라도 부산에 바다를 찾고 뒤지고 수 없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는 임진왜란이 벌어지고 초장에 이순신이 했던 말을 되새기며 각본의 전개 부분에 다시 심혈을 기울여갔다. 그는 정말 바다의 신처럼, 바다의 장수처럼, 그리고 바다의 용맹한 사자처럼 그렇게 싸웠다는 것을 기환은 알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이순신을 표현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완벽한 전쟁의 승리자였던 그를 오백 년이 지난 지금 나같이 초라한 작가가 어찌 다 표현하고 쓸 수가 있으며 그를 영화로 그려낼 수 있을지 기환은 통영의 당포항 앞바다에서 긴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순신의 엄중하고 무거운 소리가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듯이 내리누르며 그에게 어떤 일을 획책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가벼이 움직이지 말고 산같이 정중하라."


는 이순신의 말이 산처럼 무겁게 전투에 임하되 왜적들에게 절대로 들키지 않기 위해서 하늘의 독수리처럼 순식간에 적장을 물리치라는 비장한 외침 같기도 했다. 그랬다. 기환이 보기에는 이순신의 하늘에 가장 뛰어난 전술가 중에 하나인 독수리처럼 매섭고, 독수리처럼 강했던 장수였다. 그래서 그는 원균이 끌고 온 판옥선이 1척밖에 없었을 때도 실망치 않았을 것이고, 숨어 있던 원균의 부하들이 나타나서 싸움에 당당히 맞절을 때도 그들을 충분히 다독일 수 있는 아버지 같은 마음이 있었으리라.


"죽지 마라 나에게는 너희가 조선이다."


는 말로 전라 좌수영 판옥선 24척과 경상 우수영 판옥선 4척을 이끌고 5월 6일 당항포에 도착했을 때 그 작은 포구에서 이순신은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룻밤을 보냈을까를 생각하니 기환은 다시 이순신이 임진왜란의 초기 진압을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 조선의 가장 위대한 영웅의 시작은 바로 곧 죽을지도 모르는 병사들에게 "죽지 마라 나에게는 너희가 조선이다."라는 가장 큰 동지애를 보여준 것이었고, 죽음 앞에 벌벌 떠는 병사들에게 조선이란 나라를 인지시키고 그들에게 나라를 위해 싸울 의지를 함께 불태운 그는 전쟁의 위험에 처한 조선을 구하고자 하는 큰 결의가 느껴지는 한 마디가 아닐 수 없었다.


방개도 가끔은 기환의 취재길에 따라 오르기도 했다. 당일치기가 힘든 취재다 보니 방개는 덕구의 아내가 와 있거나 덕구의 조카 미자가 가끔씩 온양에 들릴 때면 기환과 함께 이순신 취재에 따라다녔다.


그러다 보니 기환의 취재에 따라다니며 이순신 공부를 현장에서 하는 것은 방개의 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성웅 이순신 연작시를 쓰는 데는 굉장한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이순신 연작시 5.   산 같은 사람, 이순신


오천 년 역사 속에서 태백산처럼 무거운 사람 본 적 있소.


오천 년 지나서 여기,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산의 무게를 재보고

이 땅을 지켜낸 사람들 무게를 재보고


지리산에 계룡산에 무등산에 올라가 봐도

나는 산 같은 조선인은 본 적이 없었소.


그런데, 누가 산의 무게를 잴 수가 없듯이

이 조선을 지켜낸 이름 없는 민초들과 무덤조차 없는 전쟁의 포로들

병사들 울고 있는 골마다

저 말없는 산은 그들의 슬픔을 침묵의 무게로 다 덮고 있지요.


침묵하는 자는 언제나 이기는 법,


누가 승리를 장담하고 전쟁에 나가랴!

그러나 당신은 왜적의 조총 소리에 그 어마어마한 총소리에도

눈하나 꿈쩍을 하지 않는

무겁고, 고요한 침묵의 산이였습니다.


태백산이었고, 한라산이었고, 지리산이었고, 무등산이었고,

내장산이었고, 덕유산이었습니다.


그 골짜기마다 당신이 던진 위엄한 한 마디는

"가벼이 움직이지 말고 산같이 정중하라."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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