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3일 동안 일어난 일
강윤기는 추위에 의식을 잃었던 서영이 잠들었다 깨었다를 반복하며 서서히 체온을 되찾는 것을 지켜보며 아내 혜림에 대한 생각을 줄곧 했다. 헤어졌지만 그립기도 하고 보고 싶지만 볼 수는 없게 된 이혼한 아내. 그에게는 어디선가에서 기차가 멈추고는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답답하고 괴로운 사람이 아닐 수가 없는 그리움의 대상이 바로 아내였던 혜림의 존재였다.
사랑한다고 다 끝까지 살 수는 없는 것이 부부의 인연인가? 할 정도로 강윤기는 아내 혜림과 대학의 은사이면서 총장이었던 장인과 자신의 관계를 생각했다. 그리고 서영의 아버지인 김화백과의 깊고도 깊었던 화가로써의 스승과 제자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내의 정신적인 병력으로 인해 의사의 길을 포기했었고,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의 길을 들어섰지만, 그 길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과 아내를 정신병원에 보내야 했던 크나큰 괴로움을 준 장인에 대한 분노가 절망의 끝없는 나락에서 붙잡은 그림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김화백을 만나게 된 운명 같은 끈을 다 풀어내기에는 젊은 날 자신의 삶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바로 그것이었다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화실 소파에는 김화백의 딸 서영이 가냘픈 몸을 눕히고 의식을 잃었다가 회복하며 누워 있는 것이었다.
강윤기는 아내와 서른다섯에 헤어지고 십 년 동안 독신으로 살았지만 아직은 마흔다섯이란 젊은 나이에 남자였다. 전공의 공부도 다 마치고 의학박사도 다 받았지만, 그는 아내를 정신병원에 보내야 하는 자신을 용서하기도 힘들었지만, 더 용서하기 힘든 장인에 대한 생각도 그를 아주 오랜 시간 고통스럽게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장인도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자신을 화가로 만들어 준 김화백도 세상을 떠나고 없으니 그에게는 원망과 고통의 대상도 감사와 기쁨의 대상도 다 떠난 빈자리만 남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정신병원에서 자기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아내 혜림이 오늘도 길고 긴 잠 속에 빠져있거나 멍하니 창밖을 보거나 하면서 지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릴 정도로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강윤기는 혜림이 이 세상이 남긴 유일한 혈육이요 자신의 딸인 정아를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보는 것이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다. 정아는 장모 손에서 자랐고, 그에게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만 면회가 되는 정도였다. 이제 여고 1학년인 정아는 아내를 똑 닮았다. 귀티가 나는 우등생이 정아의 모습이다. 언제나 반듯하고 공부는 언제나 탑이라고 했다. 아직 정아는 엄마가 정신병원에서 평생 살아야 할 정도인 것은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정아도 강윤기도 그리고 혜림의 엄마인 장모도 유일한 희망을 그리는 것이 있다면 혜림이 언젠가는 좋아져서 장모님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대저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장모에게도 그러나 그런 꿈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은 다는 걸 돌아가신 장인은 누차 그녀에게 말했을 정도라고 하지만 장모는 딸 혜림을 위해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강윤기는 아직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지를 않았기에 장모의 기도가 과연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기도인지는 언제나 의아할 뿐이었다. 딸 정아도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훈련시켜서 그런지 강윤기 자신보다 어느 때는 더 엄마에 대한 회복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그는 놀랐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내 아내가 다시 회복이 되어서 정상인이 될 수 있었다면 그 일은 벌써 오래전에 일어났어야 하지. 병원에 입원한 지가 십오 년이나 지났는데, 이제는 내 아내는 가끔씩 찾아가는 내 얼굴도 잘 기억을 못 하는데 어떻게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겠어. "
강윤기는 독백처럼 혼잣말을 하며 어둠이 깊어진 창밖에 나무들이 화실 안에 불빛으로 눈송이가 하얗게 덮여서 온통 눈꽃 세상이 펼쳐진 것을 바라보았다. 강윤기는 서영이 누워서 다시 잠이 들면서 손과 발이 따스해지자 그녀의 머리맡에서 일어나 자기가 그리던 그림의 캔버스에 다시 붓을 갖다 대었다. 블루색의 물감에 붉은색을 섞었다. 눈보라가 일면서 바람이 부는지 화실 지붕에 눈덩이가 쿵쿵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