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이 깊은 잠에서 깬 시간은 아침이 오기 전 어둠이 막 커튼을 젖히고 달아나기 직전 이였다. 너무나 오랫동안 잠을 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리가 쑤시고 아파서 서영은 선뜻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처음 눈을 뜨고 그녀가 본 집안의 풍경은 자기 집 거실이 아닌 어느 화실 같다는 느낌이 들 뿐이였다. 이젤과 물감이 널브러져 있고, 그림들이 여기 저기 걸려 있는 것이 분명 아들 차웅이와 살던 아버지 김화백의 거실이 아니였다.
서영은 허리에 통증을 느끼면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약한 미등이 켜져 있는 커다란 홀 같은 화실은 한쪽에 페치카로 쓰이는 난로에서 커다란 주전자에 물일 끓고 있었다. 서영이 두리번 거리고 일어나려고 하자 저 끝에서 잠깐 잠이 들었던 강윤기가 몹시 놀라듯이 몸을 일으키며 잠을 깼다.
"아, 죄송해요. 피곤했는지 저도 깜빡 잠이 들었었는데, 깨어 나셨군요."
"어머, 죄송합니다. 주무셨나본데..... 그런데 지금 몇시가 된건가요? 제가 통 정신이 없네요. 왜 여기서 잠을 잤건가요?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서영씨가 눈속에서 잠시 추위에 의식을 잃어서 제가 업고 올라왔었는데, 정신이 깨어나고 나서 계속 주무시길래 가만히 두었습니다. 침대방에 옮겨 드릴까 하다가 잠에서 깰 수도 있어서 그대로 두었지요. 몸은 어떠세요. 제가 체온은 몇번 재봤는데 정상으로 돌아왔었거든요. "
"네 여기 화실도 너무 따뜻하고 저는 지금 제 몸은 컨디션이 굿인데요. 제가 눈속에서 의식을 잃었었군요. 어쩐지 분명히 차를 타고 내려가건는 기억이 나는데 올라온 기억이 아직은 가물거리네요."
"쓰러져서 의식을 회복 못하면 전 서영씨 때문에 헬기를 불러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하하하"
강윤기가 마루 바닥에서 카페트에 덮힌 담요를 걷고는 난로가로 와서 따뜻한 보리차를 다시 한 컵을 따라서 서영에게 내밀었다. 보리차의 향기가 그녀의 코끗에서 아련한 추억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서영이 좋아하던 엄마의 냄새였다. 겨울이면 늘 보리차를 거실 한가운데 전기 스토브에서 끓이시던 엄마는 아침에 눈을 뜨는 가족들에게 보리차를 식혀서 마실 수 있도록 쟁반위에 둥근 주전자에 따라 놓으셨었다.
학교가 급한 오빠들은 아침 밥을 먹지 못하는 날에는 엄마가 미리 따라 놓은 따스한 보리차에 미숫가루를 타주면 그걸 한 컵씩 마시고는 달려 나갔다. 그러나 서영은 어린 초등학교때부터 그 보리차에 꿀을 타서 마시면 그렇게 달고 맛있는 차가 없었다. 서영은 갑자기 그 엄마의 꿀보리차가 생각이 났다.
"저 혹시 강선생님 집에 꿀 없나요?"
"아, 단게 마시고 싶으시군요. 저희 집에 직접 만들었다고 누가 선물한 밤꿀이 있습니다. 단맛은 아카시아꿀보다는 덜하지만요. 그거 갖다 드릴께요."
서영은 강윤기가 가지고 나온 꿀 단지에서 꿀을 크게 한 숟가락 떠서 보리차에 넣고 휘휘 젖으며 꿀보리차를 호호 부는 소리까지 내며 한 컵을 다 마셨다. 강윤기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우스운지 화실 바닥 카페트에 앉아서 무릎은 세우고 가만히 그녀가 꿀보리차를 마시는 걸 바라보고 옅은 미소을 지었다. 밤의 시간들이 다 지나가고 새벽의 미명이 문을 두드리듯이 눈송이들이 창가에 하얗게 매달렸다가는 떨어지는 모습들이 새벽빛에 부딪치며 선명하게 보였다. 그 모습은 참 아름답고도 신기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서영은 아들 차웅이 잘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 시간 전화를 할 수는 없었다. 서영은 가만히 강윤기가 담요를 덮고 바닥에서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잠시 어색한 침묵을 깨야 할 어떤 말도 생각이 나질 않아서 핸드폰에 음악을 틀었다. 무엇인가 다른 소리를 내야 할 것 같아서 그녀는 창밖에 눈을 바라며 음악을 듣고 싶었던 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