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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Jan 21. 2024

미역국

1. 몇 년 전 생애 처음으로 주례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 제가 그러할 나이도 상황도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저에게 주례를 부탁한 사람은 제가 대학원을 마치고 상담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만났던 여학생이었습니다.     

 

2. 상담실에 왔는데 평소와 다른 표정으로 자리에 앉자마자 피 같은 눈물을 소리 없이 흘리는 게 아닙니까. 늘 살기 어린 눈빛만 보다 낯선 모습을 보니 무슨 일이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울다 입을 열었습니다. 좀 전에 중절 수술을 하고 상담실에 왔다고 했습니다. 놀란 마음에 가서 쉬어야 하지 않겠니 하니 말없이 울기만 합니다.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니 대답이 없습니다. 지켜보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좁디좁은 상담실에 앉아 ‘마음이 어떠니?’ 이런 교과서 같은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아 상담실에서 데리고 나와 근처 식당으로 갔습니다. 중절 수술을 하더라도 출산과 비슷한 몸 상태라는 걸 어디서 주워들은 게 생각이나 식당에 가서 미역국을 시켰습니다. 소리 없이 울면서 미역국을 다 먹었습니다. 다 먹은 후 미역국을 포장해서 들려 보내면서 집에 가서 몸 따뜻하게 하고 쉬라고 하며 보냈습니다.    

  

3. 그 이후 상담실에서 몇 번 정도 만나긴 했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얘기는 나누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10여 년 시간이 흘러 그 친구에게 연락이 온 것도 놀라웠는데 주례를 부탁하니 더 놀라웠습니다. 나에게 주례를 부탁한 이유에 대해 묻자 미역국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 당시 상담자로서 경험도, 경력도 미천하였기에 스스로 괜찮은 상담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감사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상담실 밖에서 내담자에게 밥을 사주는 것은 상담자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이고 상담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무식하니 용감했던 것 같습니다.

     

4.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고 상담을 공부하고 해 오면서 배웠는데 미역국이 그 친구에게 좋은 흔적을 남긴 것 같아 이 일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돌이켜 보면 저의 무지함을 감추기 위해 전문적인(?) 상담기법이나 온갖 심리학적인 지식으로 그 친구를 대하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결국 마음이 전해져야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무식하긴 하지만 용감하진 않아 상담실에 오신 분들에게 미역국을 사드리는 일은 없겠지만 결국 상담이라는 건 잘 기억되고, 잘 보내고, 마음에 남기는 일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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