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의뢰 수가 점차 쌓이면서 의뢰인들의 정확한 니즈를 파악하는 나만의 노하우가 생겼다. 편지의 종류마다 내가 알고 있으면 좋을 법한 내용들을 모아 질문 리스트를 작성해 두었다. 그 리스트를 제공한 후, 의뢰인의 답변을 받아 편지글로 다시 적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결혼식 축사를 의뢰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질문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신랑 축사 질문 리스트
1. 두 분의 관계(어떤 사이인지 구체적으로/나이/호칭/둘만의 별명..)
2. 신랑과의 추억(가장 기억에 남는 재밌었던, 고마웠던, 미안했던..)
3. 신부에 관한 이야기(처음 소개받았던 날의 인상, 전해 들었을 때 느낌, 연애할 때 신랑의 모습...)
4. 신부에게 하고 싶은 말(당부의 말)
5.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6. 원하는 유머, 감성의 비율
7. 그 외 제가 알면 좋을 만한 상황
의뢰인들이 위 질문에 따라 각자의 이야기를 적어주면, 나는 그 이야기들 중 몇 가지를 취사선택하여 낭독 가능한 편지글 형태로 적어주는 것이다. 축사는 결혼식에 참석한 수많은 하객들과 신랑 신부 앞에서 낭독하는 편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퍼포먼스 요소가 필요하다. 의뢰인의 성향과 결혼식장의 분위기 등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고, 3분 내외의 시간 안에 재미와 감동을 모두 잡아야 하는 힘든 작업이지만, 축복의 글이어서 그런지 쓰는 내내 기분이 좋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의뢰이기도 하다. 신랑 신부에게 기억에 남는 선물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 다른 편지 보다도 좀 더 신경 써서 수정하고 꾸미게 되는 것 같다.
스스로 축사 의뢰에 도가 텄다고 생각할 무렵, 세 살 터울의 친오빠 축사를 부탁한 화영 씨의 글을 읽고 나는 자신감을 잃었다. 화영 씨가 적어준 답변보다 더 감동적인 축사를 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이야기에서, 묵묵히 적어 내린 오빠에 대한 감상에서 나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두 남매의 절절한 이야기를 3분 내외로 축소시킨다는 것이 어쩐지 죄를 짓는 기분마저 들게 했다. 나를 울린 화영 씨의 글을 일부 공개한다.
1. 두 분의 관계(어떤 사이인지 구체적으로/나이/호칭/둘만의 별명..)
유진석 1988년생 (용띠, 35세) / 유화영 1991년생 (말띠, 32세)
백반집을 운영하시던 어머니께서 2010년에 돌연사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2015년 병환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경제력이 없었으므로 오빠는 일찍부터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왔습니다.
2. 신랑과의 추억(가장 기억에 남는 재밌었던, 고마웠던, 미안했던..)
2016년 여름, 저는 돌아가신 아버님께 못난 딸이었다는 죄책감에 불안증이 극에 달한 상태였고, 경제 활동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기록적인 폭염이 지속되던 시기에 휴가를 맞은 오빠는 우울하게 누워만 있던 저에게 '놀이공원 갈래?'라고 말하며, 절 집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음료수를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날씨였으므로 놀이공원엔 사람이 없어 제법 많은 놀이기구를 탔습니다. 그때 오빠와 함께 후룸라이드를 타며 찍힌 사진은 지금도 제 왼팔 상부에 타투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타투 아래에는 불어로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라는 글귀가 쓰여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 집이 문제야! 이 집, 이 공간이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 같아.’라는 볼멘소리를 달고 사는 저를 위해 오빠는 회사에 지방 발령을 신청하였습니다. 제 불안증이 사그라드는 동안, 영업직인 오빠는 저를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과 동시에 주 4, 5일씩 반복되는 술접대를 지속하면서 건강이 매우 나빠졌으며, 만나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 외로움을 혼자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습니다. 오빠는 둔해서 당시에 본인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지조차 몰랐을 것입니다. 어리광을 피우고 의지할 존재가 주변에 없었으니까요.
살면서 손에 꼽을 만큼 몇 차례 안 되지만 다치거나 아파서 수술대에 누울 때마다 번번이 옆에서 “야, 무섭냐? 쫄지 마.”라고 놀리듯 말하며 보호자로 있어주었던 오빠. 장가를 가더라도 제가 시집가기 전까지는 오빠가 저의 보호자일 테지만 저 역시 2-3년 안에는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오빠가 저의 보호자일 날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또한, 장가가고 나서 자식도 낳고 하면 오빠는 더더욱 본인의 가정에 충실히 살아야 하므로! 이런 기억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칠 때마다 몹시 애틋한 마음이 되곤 합니다. 아플 때마다 오빠가 늘 옆에 있어줘서 얼마나 든든했는지... 하고.
의뢰글을 읽다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이 보이고, 그 사람의 가치관이 보이고, 그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 그 덕에 나는 원래의 나라면 절대 알지 못했을 감정을 느낀다. 하나뿐인 나의 보호자, 친오빠를 장가보내며 느낄 수많은 감정들 - 고마움, 미안함, 아쉬움, 불안함 - 을 하나하나 거친다. 하지만, 이렇게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감정들을 느끼고 나면, 부담이 생겨버리고 만다. 나의 글이 이 감정들을 해칠까 봐, 오롯이 전달하지 못할까 봐. 그래도 의뢰인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나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축사를 썼다.
오빠와 별거 아닌 일로 다투고 속상해했던 일도 물론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 오빠를 바라보고 있자니 고마운 일들밖에 안 떠오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2016년 여름, 극심한 우울감에 그저 누워있는 것밖에는 할 수 없던 나에게 오빠는 ‘놀이공원 갈래?’라고 물었지. 그 더운 여름날,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신 채 걸어 다니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우리 둘은 싫은 소리 한번 없이 최선을 다해 놀이기구를 탔어. 마치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비록 생산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무엇인가에 몰입을 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됐었어. 후룸라이드를 타고 바람을 가를 때, 그 바람에 땀을 식힐 때,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었어.
나를 살게 한 오빠는 내 유일한 혈육이자 보호자였어.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수술대에 누울 때면, ‘무섭냐? 쫄지마.’라는 짓궂은 말로 날 웃게 해 줬던 오빠. 항상 내 옆을 든든하게 지켜줬던 오빠가 있었기에 나는 무서울 게 없었어. 무뚝뚝해서 말 못 했었지만, 내가 많이 고마워. 오빠가 장가를 가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면 더 이상 나만의 보호자가 될 수 없음을 알지만 나는 서운하기보다 마음이 편안하더라. 그건 아마 지금 오빠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이 영지 언니이기 때문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