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돌연히 Oct 21. 2023

편지 대필 작가로 살다 보면,

편지 대필을 시작한 이후로 나만의 모닝 루틴이 생겼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의뢰 내용을 확인하고 편지 초안을 작성한다.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일찍 회사에 도착한 후, 휴대폰으로 적어놨던 초안을 컴퓨터로 옮긴 뒤 다시 한번 차근차근 읽는다. 나는 '스티커 메모' 앱을 이용했는데, 휴대폰 화면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전체적인 분량이나 편지 구조 등을 수정하기 용이했다. 한 번의 수정을 거친 편지를 의뢰인에게 전달하면 어느새 업무 시작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루틴이 반복되던 평온한 어느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팀장님은 컴퓨터 화면을 보며 놀란 목소리로 '이게 뭐야!'라고 소리쳤다. 당혹스러움이 묻어난 목소리로 자신의 컴퓨터에 누군가 편지를 남겨뒀다고 하셨다. 곧이어 들려온 '초롱이가 누구야?'란 말에 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초롱이는 며칠 전, 내가 대필한 연애편지의 의뢰인 여자친구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회사 내 모든 컴퓨터는 똑같은 마이크로소프트 아이디를 공유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스티커 메모 '의 내용은 전부 연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스티커 메모'가 그 이름값을 해서, x버튼만 누르면 스티커처럼 떨어져 나가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 모든 내용이 차곡차곡, 그것도 모든 회사 사람들의 컴퓨터에 쌓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다행히 팀장님이 발견한 그날까지 그 누구도 스티커 메모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편지는 안전히 보관될 수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참 아찔한 경험이었다. 회사에서 일은 안 하고 편지를 쓰고 있냐며, 팀장님께 꾸중을 들을 땐 억울함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있지도 않은 내 남자친구 이름이 초롱이라고 소문이 났을 땐, '왜 하필 또 초롱이일까. 이왕이면 좀 더 남자다운 건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에 눈물이 났다.




하루는 어딘가 의뭉스러운 메시지가 왔다.

지금 연락 가능하신가요?

네 가능합니다. 어떤 목적의 편지 의뢰세요?^^

지금 일정이 있으신 거면, 나중에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제 이야기 때문에 기분이 언짢아지실까 걱정되네요.


도대체 어떤 사연이길래, 내가 듣자마자 기분이 나빠질 거라 생각한 걸까? 나는 실제로도 괜찮았을 뿐 아니라,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들어 빨리 듣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내게 의뢰인인 척 접근한 여성은 내 전남친의 여자친구였다. 당시 인스타그램을 따로 하지 않았던 나를 찾아낼 방법은 남자 친구가 지나가듯 얘기했던 '편지 대필 작가'라는 내 정보뿐이었고, 밤샘 서칭을 통해 날 찾아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지난주 이별을 통보했으며, 그건 아무래도 나를 못 잊어서인 것 같다고 했다. 지금 나에게 연락이 오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봤다. '이거 참- 이 여자 대신 내가 내 전남친를 붙잡는 재회 편지를 적어줘야 하나'싶었으나 나란 사람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나는 생각보다 더, 더, 편지 대필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편지 대필을 통해 만난 의뢰인의 감정과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한다. 혼자 고민해서 안 풀리는 문제는 의뢰인과의 대화를 통해 답을 찾아가고, 최종본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수정하는 시간을 거친다. (이 일련의 과정을 내 전남친의 여자친구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마음 써서 쓴 편지에, '너무 좋았습니다.'라는 리뷰와 함께 별점 3.0/5 점이 찍힐 때면, 눈물이 찔끔 나온다. 모든 자영업자들이 한 번쯤은 보게 되는 그 별점이 뭐라고, 울컥울컥 서운함이 올라와 잠을 못 잘 때도 있다.


월급 루팡으로 오해를 받더라도, 전남친의 여자친구에게 불쾌한 연락을 받더라도, 내가 부운 진심과는 무관하게 매겨지는 별점에 속상하더라도, 내가 이 일을 끊을 수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미 나의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속, 편지 의뢰를 통해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상황, 관계, 감정을 배우는 일을 사랑하게 됐기 때문이다.


편지를 대필하며 위로받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요즘엔 잘 쓰지도 않는 편지를 대필'씩'이나 맡기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함이 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편지지에 꾹꾹 눌러 담아 전달하는 낭만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 세상을 넓혀주고, 그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에너지는 나에게 오늘 하루를 살아갈 힘이 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의뢰인을 위해, 아니 나를 위해 편지를 적는다.    


*댓글이 달림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완벽한 글이 완성되었다.

이전 09화 내 하나뿐인 보호자를 장가보내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