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온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사케처럼 취하고 생크림처럼 물리는

by Roselle

일상이 늘 화려했던 20대 중반, 대학생 시절. 그때의 핫플레이스는 단연 강남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불금, 여고 동창과 함께 어두운 술집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여자보다 피부가 더 뽀얀 남자와 기생오라비처럼 잘생긴 남자 둘이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합석했고, 술이 오갔다. 어느새 내 옆엔 그 뽀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날따라 속상한 일이 있었는지 꽤나 취했던 나는,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들과 함께 택시를 탔다고 한다. 취한 내가 먼저 집 앞에 배송됐고, 계속 이동하며 그 남자가 내 번호를 물어봤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줬다. 친구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유일하게 외우고 있는 내 번호를 그의 손바닥에 써주었다고 했다.

눈에 보이지도, 기록으로 남지도 않는 전달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다음 날 연락이 왔다.


술이 깨고 나서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창피하면서도,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왠지 그 남자에게는 잘 보이려 애쓸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예감, 그렇게 해서 시작된 관계.

두세 달에 한 번씩 그를 만났던 것 같다. 처음 몇 번은 서로를 탐색하는 단계였고, 다음은 조금 친해진 오빠 동생 사이, 그리고 반년쯤 지났을 무렵, 우리는 뽀얀 속살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여자 모델처럼 가늘고 길쭉한 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체구도 작았다. 부드러운 얼굴선만큼이나 웃음도 부드러웠다. 술을 따를 때나 사랑을 나눌 때나, 그런 부드러움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의 침대에서의 밤은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만큼 인상적인 장면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기억에 남는 건, 술집에서의 그의 눈빛, 아침에 물 한 컵 챙겨주던 자상함이었다.

그와는 늘 이자카야를 향했다. 일본식 선술집을 좋아했다기보단, 여자와 조용히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센 술을 즐기지 않아 사케를 주로 시켰고, 그 덕에 나는 사케가 내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 만남에서 이미 내 취한 모습을 보여줬던 탓인지, 이상하게도 그와 있을 때면 늘 취했다. 길바닥에 쓰러지거나 필름이 끊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밤을 함께하게 되는 정도의 취함이었다.


그렇게 2년, 우리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섹스 파트너가 되었다. 서로 자주 연락하지 않았고, 가끔 좋아하는 음악이나 책, 인턴십 이야기 같은 걸 나누긴 했지만 개인적인 정보는 거의 알지 못했다. 그의 집은 시까지만, 직장은 대기업 계열사 정도, 출신 학교도 몰랐고 친구 얘기도 들어본 적 없다. 당연히 그도 나에게 어떤 질문도 없었다. 묻지 않는 것보단 묻기 싫은 느낌. 아마 그래서 그를 계속 만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의 연락엔 항상 바쁜 그였고, 그의 연락엔 항상 응하는 나였다. 뉴스 속보를 핑계 삼아 출근하게 됐다며 약속을 미뤘을 때도,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며 효자인 척했을 때도, 그저 속아주었다. 조금 후에 내가 직장인이 되었을 때 알았다. 그의 직군은 긴급 호출이 필요하지 않은 부서라는 걸. 그때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더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않게 나 혼자만 왔다 갔다 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아마 우리가 어울리지 않음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접점 없는 술집에서 만난 게 다행이었는지도.

오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켰더니 케익 한 조각을 받았다. 생크림 베이스에 생귤이 듬뿍 올라간 케익은 봄시즌 신상 케익인 듯하다. 원래 케익을 즐기지 않는 편이라 아주 오랜만에 입에 넣은 케익은 정말 너무너무 달았다. 단 몇 초 만에 입안 가득 퍼지는 단맛은 울고 있던 아이도 금방 웃게 만들 것 같았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케익을 좋아하지 않을까?

아이에게 초콜릿을 처음 허락하는 시기는 부모에게 꽤 큰 고민거리다. 그 맛을 보는 순간, 세상에 모든 음식은 외면받기 때문. 실제로 단맛을 느낄 수 있는 미각 수용체를 가진 생명체는 당분에 끌리도록 진화했다고 한다. 뇌와 장기의 활동에 포도당이 필요하며,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나.

하지만 나는 단맛을 선호하지 않는다. 커피와 차 외에는 음료도 거의 마시지 않고, 술도 드라이하게, 과일도 신맛이 강한 걸 고른다. 케익 안 먹는 이유는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내 속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구의 70%가 유당불내증이라는데, 나도 그중 하나인 것 같다. 게다가 탄수화물을 많이 먹으면 어김없이 두통이 찾아오니, 빵 종류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먹는다. 생크림과 밀가루, 단맛의 조합은 내게 독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내게 생크림 케익 같은 존재였다. 없으면 없는 대로 찾지 않던 그인데, 왜 그의 연락에는 부지런히 달려 나갔을까. 그를 만나 몇 시간은 단맛에 빠졌지만, 단향이 사라진 후에는 입안이 메마른 채로 더부룩한 속을 달래기 위해 며칠을 보내야 했을 것을. 평소 좋아하지도 않는 걸 공짜라고 받아먹는 어리석음처럼, 그렇게 2년을 보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아깝지도, 아쉽지도 않다. 하지만 내 뇌가 잠시 단맛을 느꼈던 기억, 불량식품 같던 그를 문득 떠올려본다. 덕분에 최소한 사케 주량 정도는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까.


나는 나로 살아야 한다. 누군가의 부드러움에 기대어 잠시 녹아드는 건 따뜻했지만, 결국 단맛 뒤에 남겨진 속앓이는 나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 내가 불편해하는 것들, 내가 원하는 거리감을 애써 무시하며 맞춘 시간들은 결국 나 자신을 잃게 했다.

그와의 관계는 깊지 않았기에 덜 아프고, 덜 그리웠지만, 그 안에서 나는 나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나다웠다면 그와의 관계는 완전히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가 내게 바랬던 건 처음 봤을 때 나다웠던 모습일지도.

우리는 사랑을 할 때 종종 ‘우리’를 만들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되기 위해 나를 꾹꾹 눌러 담아야 한다면, 그것은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 사랑은 공존이지 흡수당하는 것이 아니니까. 생크림 케익처럼 달콤하지만 버겁던 시간 끝에서, 나는 비로소 나답게 사랑할 준비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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