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사이 친구 없다더니
세탁하기도 어려운 새하얀 셔츠, 곤색 혹은 쥐색으로 덮인 재킷, 신축성 없는 플리츠 스커트까지.
대한민국 학생이라면 최소 6년간 그 옷을 입고 다닌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어디 소속'인지 쉽게 읽히는 탓에,
교복 상태의 학생들에겐 자유보단 제약이 따르는 시기.
여중여고를 다녔지만 오빠와 친했던 나는 오빠 친구들과도 어울렸다.
남중남고였던 오빠 학교 정문에서 교복 치마를 입고 서 있던 나는 외모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시선 강탈이었다.
항상 누구냐는 물음이 따라왔지만, 꼬박 3년을 다니니 나중에는 학생주임 선생님의 눈길도 거둔 나였다.
그 정도로 오빠들과 친했던 나는 어느새 학교에 소문이 나있더라.
"남자가 매일 바뀐다"라고.
소문이 무색하게도 나는 10대의 연애는 해 본 적이 없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수학 문제를 풀며 쉬는 시간을 보냈고, EBS 문제집 대신 패션 매거진을 모으러 서점에 다닌 나였다.
모범생도 날라리도 아닌 애매한 나에게 일탈 같은 친구가 생겼다.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살다 온 중학교 친구는 나와 다르게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여자 사람 친구보다 남자 사람 친구가 많았던 그녀는 나를 종종 불러 놀았고,
그중에는 지금 생각해도 편했던 친구가 하나 있다.
형식적인 호의, 진심 없는 가식, 허세나 허황을 싫어하는 우리는 서로가 가장 편했고, 솔직했고, 공감했다.
누군가와 이렇게 마음이 맞을 수도 있구나 싶었던 친구.
'남사친'이라는 단어보다 그냥 '마음 맞는 사람'. 그랬다.
열아홉의 겨울, 우린 동시에 연애를 시작했다.
나의 중학교 친구는 가장 친한 남사친이 남자친구가 됐고, 나는 그 남자친구의 유학생 친구를 소개받아 속전속결의 연애를 시작했다.
남사친도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어떻게 만났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아마 교회인가 학원이었던 것 같다. 그의 여자친구는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졸업도 아직, 학교도 끝나지 않았는데 애매하게 시간이 뜨던 그 겨울,
우리는 각자의 연애에 충실했다.
아침 운동 핑계로 몰래 나와 맥모닝을 먹으러 가고, 부모님 출근한 사이 방에서 꽁냥 거리고, 더블데이트로 노래방이나 당구장을 가기도 했다.
공원에서 걷기만 해도 좋았던 캐럴이 울려 퍼지던 그런 12월이었다.
크리스마스 낭만이 끝난 탓일까.
비슷한 시기에 나와 남사친은 동시에 서로의 연인에게 실망하기 시작했다.
사투리가 거슬리기 시작했고, 작은 허세가 눈에 밝혔다. 밥 먹는 모습도 보기 싫어졌다.
'서서히'가 아니라 스위치처럼 한순간 식어버린 나는 표정 하나 꾸며내질 못했고, 상대는 내 눈치를 봤다.
우리는 따로 데이트를 하고, 서로에게 연락해 연인을 욕했다.
데이트보다 그와의 약속을 먼저 잡는 날도 많았다.
그러다 어느 날, 어김없는 데이트 중 문득 깨달았다.
나는 내 옆에 나를 좋아하는 남자를 두고 다른 남자의 답장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갑자기 연인이 싫어진 게 아니라, 남사친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이 연애는 의미를 잃었고, 나는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남사친을 만났다.
처음으로 술집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스무 살의 1월.
우리는 소주를 마시며 각자의 연애를 돌아보고 있었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왔을 때, 나는 마음을 고백했다.
술김이었는지 용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를 했다.
그 후 우린 연인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친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는 진부한 변명과 함께 여러 번 더 만났지만, 결국 우린 멀어졌다.
그를 잊기 위한 노력으로 나는 자주 많은 남자를 만났고 첫사랑을 잊었다.
조금 잔인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친구에게 전해 듣기론, 대학 가기 전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단다.
"대학 가면 예쁜 여자 많다"는 어른들의 흔한 거짓말이 먹혔던 걸까.
나는 친구 이상이었을까, 아니면 내 착각이었을까.
수취인 불명의 우편물 같은 나의 첫사랑은 꽤나 아팠고, 그 여파인지 나는 한동안 내 마음을 꽤나 아꼈다.
첫사랑에 후회는 없다.
그 시절의 나는 감정에 솔직했고, 사랑을 믿었으며,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꺼내려했던 용기가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어딘가에서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때론 연애였고 때론 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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