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아쉬움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명동 신세계백화점 본점은 매 시즌마다 LED 파사드로 환히 빛난다. 특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건물 전체가 거대한 트리처럼 반짝인다. 거리엔 셀카봉을 든 사람들, 삼각대를 세우는 연인들이 가득하다.
그 빛나는 건물을 배경으로,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이직 후 처음으로 메인을 맡은 대형 프로젝트였다. 파트너사는 10년 넘게 거래해 온 곳이었고, 무려 다섯 팀, 20여 명이 함께 움직이는 행사였다. 매주 두 번씩 이어지는 미팅, 한 주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만큼 숨 가쁜 일정 속에서, 나는 그를 처음 보게 되었다.
첫 미팅 날, 내 앞쪽으로 다섯 명이 나란히 앉았고, 그는 약간 왼쪽 자리에 마주하고 있었다. 명함을 나누고, 컨셉을 정하며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중, 이상하게도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사람의 양쪽 눈을 합친 시야각은 수평 180°, 수직 120°라고 한다. 내 눈이 정면을 보고 있더라도 사실 옆사람의 행동이 다 보이는 것이다. 나는 정면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눈동자의 가장자리로 그의 시선이 내게 오래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부러 못 본 척했지만, 그의 눈매는 선명했고, 웃을 때 번지는 미소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날 눈을 마주치지 않아서일까? 그다음 미팅부터 그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각 팀의 업무가 나뉘어 있었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그의 담당 분야를 맡았다. 회의에서 얼굴을 보고, 회의가 끝난 후에는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조금씩 말이 많아졌다. 간혹 회신이 느릴 땐 전화를 걸었고, 운전 중인 그가 받는 통화에서 전해지는 낮은 음성에 괜히 혼자 귀 기울이곤 했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나는 분명 그에게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행사 당일. 밤샘 작업으로 녹초가 된 상태에서, 나는 부스도 보고, 무대도 확인하고, 상사의 오더를 수행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가 맡은 프로그램의 리허설과 진행 상황이 자꾸 신경 쓰였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내게 이것저것 물으며 의지했고, 달달 볶으며 걱정과 기대를 쏟아냈다. 그런 그를 달래며, 내 일을 해내며, 틈틈이 그를 살폈다. 중간중간, 취미를 묻거나 농담을 던지는 짧은 대화들이 오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엔 또 각자의 바쁜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정신없이 사람들 사이를 오가던 중,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멀리서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과 딱 마주쳤다.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피하던 그의 시선을 보며, 나는 그게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갈 곳 잃은 눈을 돌리며 딴청 피우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어떻게 마무리했는지도 모를 만큼, 그날은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갔다.
연신 "밥 한 번 먹어야 되는데... 아쉬운데..."를 연발하는 그를 보며, 조금은 기대했던 것도 같다.
행사가 끝나고, 그는 회식 자리에 갔고 나는 남아서 마무리 정리를 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약간 술에 취한 듯한 말투.
나는 홀로 늦은 저녁을 하며 소주를 한 잔 기울였고, 마음속 어딘가엔 묘한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는 그날 이후 따로 만남을 갖지 않았다.
일로 만났고, 일이 끝났기에, 감정은 말로 꺼내지 않은 채 그대로 지나갔다.
만약 내가 다른 말을 건넸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지금, 다른 기억을 나누고 있었을까.
그러나 결국,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나도.
일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감정은 조심스러웠고, 말은 망설여졌다.
그저 서로의 마음을 감지했을 뿐, 행동은 끝끝내 조심스러웠다.
가끔 상상해 본다. 행사가 끝난 후, 내가 정리를 마치고 그가 있는 회식 자리에 들렀다면 어땠을까. 무거운 장비 가방 대신 가벼운 맥주잔을 들고, 그와 나란히 앉아 늦은 이야기를 나눴다면. 혹은 그가 보낸 문자에, ‘지금이라도 볼래요?’라고 답했다면.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감정이 피어나던 그 시점에, 아주 작은 용기를 냈더라면. 아마 우리는 조심스럽게 웃었을 거고, 다음 약속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호의를 확인하고, 천천히 친구가 되거나 연인이 되었거나, 혹은 그래도 결국 아무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 모든 가능성을 두고, 우리는 그냥 조용히 흘려보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따금 사람 사이엔 언어보다 긴장감이 먼저 흐른다.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감정 앞에서 우리는 조심스럽고, 때로는 비겁해진다.
그러다 타이밍이 지나고, 상황이 끝나면, 말하지 않은 마음은 그저 ‘아쉬움’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된다.
관계란 때론 용기를 낸 한마디에서 달라진다.
그리고 그 한마디를 건네지 못했을 때, 우리는 그저 서로 스쳐가는 사람이 된다.
그를 오래 기억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또 다른 회의 자리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또 누군가가 조심스레 웃는 걸 보게 되면, 아마 이 감정을 다시 떠올릴 것이다.
그땐, 조금 더 솔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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