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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도리 Aug 08. 2022

계란이↗ 왔어요↘




골목은 그 자체가 커다란 아케이드였다. 온갖 부식거리부터 주전부리에 이르기까지 철제 대문이 닥지닥지 이어 붙은 좁은 흙길로 종일 뭔가를 파는 상인들이 오고 갔다. 장사꾼들은 이고 진 물건들을 바닥에 내린 뒤, 단전에서 끌어올린 사자후로 호객을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 때마침 찬거리가 필요했던 주부들은 서둘러 지갑을 챙기고, 플라스틱 쓰레빠를 끌며 대문 밖으로 종종걸음쳤다.         


육고기가 귀했던 그 시절 생선은 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우리 골목에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는 두 명이었다. 한 사람은 코미디언 남보원을 닮았고, 다른 한 명은 백남봉을 닮았기에, 우리는 둘을 남보원 아줌마와 백남봉 아줌마로 불렀다. 그녀들은 생선이 담긴 은색 다라이를 똬리 올린 머리에 이고 다녔다. 밑바닥에 찍찍이라도 붙였는지 손으로 잡지 않아도 다라이는 그녀들의 머리에 찰떡같이 붙어 있었다. 머리에는 무거운 생선을 얹고, 두 팔은 리드미컬한 박자를 타듯 자유롭게 흔들며, 입으로는 아랫배에서부터 길어 올린 고함을 내지르는 그녀들의 모습은 고수의 기예를 보는 듯 늘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라이벌 관계인지라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남보원이 먼저 동네를 훑고 간 다음 뒤늦게 백남봉이 등장하면,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생선을 사겠다고 대문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앞차가 승객을 모조리 실어간 후 연달아 달려오는 지하철 같은 꼴이다. 아침 일찍 서두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전날 저녁에 한 명이 다녀가면 다음 날은 또 허탕이다. 결국 둘은 친해지기 어려운 사이였다.


남보원 아줌마의 특징은 강매였다. 목소리는 걸걸하고 성격도 드셌다. 고등어 한 손만 달라는 손님에게 고등어에 더하여 갈치까지 열 마리 떠넘기고 마는 그런 식이었다. 손이 작고, 지독한 구두쇠였던 우리 할머니도 남보원 아줌마한테 걸리면 끝장이었다. 양미리나 몇 줄 사야겠다며 할머니가 남보원 아줌마를 불러 세우면, 나는 미리부터 심장이 콩닥거렸다. 살벌한 입씨름이 곧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분 후 아줌마는 남아 있던 생선들을 모조리 우리집 마당에 쏟아 놓고, 수돗가에서 다라이를 헹구곤 했다.


남보원 아줌마는 손님이 아무리 신경질을 부리며 손사래를 쳐도 끄떡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손님이 뭐가 필요한지가 아니고, 그녀가 뭘 팔고 싶은지였다. 10원 한 장도 허투루 쓸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남보원 아줌마의 경쟁력은 가격이었다. 그녀는 터무니없이 많은 생선을 막무가내로 내려놓고는 과감한 디스카운트를 제안했다. 어때? 이래도 안 산다고? 그 파격적 특가에 필요 없다는 말이 쏙 들어가는 것이다.


백남봉 아줌마는 정반대였다. 남보원 아줌마보다 키도 작고 몸집도 꼬챙이처럼 말라서 그녀의 대야에는 훨씬 적은 양의 생선이 들어있었다. 물건은 최상품이었고, 그녀는 소량의 생선을 흥정도 에누리도 없이 팔았다.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라 남보원 아줌마의 생선만 팔릴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전쟁과도 같은 우격다짐에 미리부터 기가 질린 사람들은 남보원 아줌마가 지나갈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백남봉 아줌마 목소리가 들리면 빼꼼히 대문을 열기도 했기 때문이다.  


백남봉 아줌마는 목소리도 사근사근했다. 생선 사이소~~~ 생선 사이소~~~ 호객의 외침도 소프라노에 가까운 단아한 고음이었다. 남보원 아줌마는 고향이 이북이었는데, 할머니는 동향이라는 이유로 주로 남보원의 생선을 팔아주었다. 실향민이라는 동질감에 기대어 남보원 아줌마는 종종 할머니에게 백남봉 아줌마의 욕을 할 때도 있었다. ‘원래 이 동네는 내 구역인데, 언젠가부터 며칠 앓은 틈을 타서 고년이 도둑고양이처럼 나타났다는 것’이다. 언제 한번 되게 걸리기만 해 보라지. 장사가 시원찮은 날이면 그녀는 백남봉 아줌마를 저주하며 씨근덕거렸다. 며칠 전에도 백남봉에게 갈치를 샀던 할머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할머니가 마당 수돗가에서 생선을 다듬기 시작하면 나도 옆에 쪼그리고 앉아 구경을 했다. 머리, 지느러미, 비늘, 내장 순서로 몸통에서 불필요한 부위가 떨어져 나가는 동안 주변으로 나른한 물 냄새와 비린내가 번졌다. 그 냄새에 마당 한구석에 매어있던 우리 집 개 방울이는 까만 코를 벌렁거리며 낑낑거렸다.


생선은 비린 맛에 먹는 거라고 얘기할 정도로, 비린 맛을 좋아했던 서북 출신 할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싼 생선이나마 밥상에 끊이지 않고 올렸다. 그런 까닭에 그때 나는 그 낡은 수돗가에서 생선이 해체되는 과정을 수백 번도 넘게 목격했다. 무섭고, 끔찍하면서, 동시에 외면하기 어려운 마력을 지닌 그 광경. 다듬기를 마친 할머니가 방울이를 위해 생선 대가리와 내장을 끓이면 온 집안 가득 견딜 수 없는 비린내가 번졌다. 방심하던 후각세포를 게릴라처럼 기습하던 그 끔찍한 냄새.


한두 번 크게 당하고 헛구역질까지 한 이후로, 나는 할머니가 생선 다듬기를 끝내면 슬쩍 집 밖으로 나와 냄새가 빠지길 기다리며 동네를 어슬렁거리곤 했다. 한 번 공간을 장악한 냄새는 몇 시간 지난다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어서, 아무리 집밖을 겉돌아도 늦은 저녁 대문을 열면 그 고약한 냄새가 마당에서부터 나를 맞이하곤 했다. 아직도 나는 생선 요리를 보면 반가움보다는 유서 깊은 공포가 앞장선다.


사실 주부들은 생선 다라이보다 채소 리어카를 더 기다렸다. 단백질 하나 없는 밥상에 익숙했던 시절이었다. 빈곤한 살림에는 아무래도 채소가 더 만만했다. 그런 이유로 채소 장수는 다른 장사꾼들에 비해 적극성과 열정이 부족해 보였다. 인기쟁이의 뻣뻣함이라고나 할까? 생선 다라이가 일일이 단골의 초인종을 누르며 제발 좀 사달라고 졸랐던 것에 비해, 채소 아저씨는 처음에만 ‘내가 왔다’는 소리를 성의없이 몇 번 지르고는 그저 그뿐이었다. 아쉬운 놈이 뛰어오라는 식이었다.  


리어카를 두 겹으로 에워싸고 열 개도 넘는 팔이 여기저기 물건을 헤집고는, 각기 다른 목소리들이 이것저것을 달라고 아우성을 부렸다. 파, 양파, 무, 배추처럼 사철 흔한 것부터 두릅, 냉이, 달래, 아욱, 토란 등 철을 가리는 온갖 생소한 이름의 채소들이 아저씨의 리어카 속에서 튀어나왔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든 없는 것 빼고 다 나타나는 그 놀라운 손수레를 보면서, 어쩌면 신비한 동물사전의 브리프 케이스처럼 아래가 무한대로 뚫린 공간이 저 아래 어디쯤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가끔 나는 상상했었다.


마구잡이로 몰아치는 온갖 요구사항을 아저씨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충 듣고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그는 어떤 물건들이 한 집으로 가야 할 것인지를 파악하고 있다가 원하는 품목을 한 봉다리에 모아 각자의 손에 정확히 쥐어주었다. 사철 새마을 모자를 쓰고 다니던 야채 아저씨는 귀도 8개, 손도 8개쯤 달린 힌두교 여신 같았다.


아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찬거리보다는 강냉이, 번데기, 아이스케키 같은 간식이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종일 입이 심심했을까. 생강엿은 최고 인기였다. 멀리서 생강엿 리어카가 보이면 골목에서 흙장난하던 애들은 미리부터 잽싸게 집으로 뛰어갔다. 엄마를 졸라 동전을 받아오기 위해서다.


리어카 복판에는 거대한 덩어리 엿이 고요한 호수처럼 자리를 잡은 채 암갈색 광채를 발산했다. 나룻배를 닮은 나무 대패가 호수 표면을 쓱싹쓱싹 왕복하면 그 위로 톱밥처럼 얄팍한 생강엿이 말려 올라왔다. 애들의 손바닥 위에 놓인 동전의 가치에 따라 대패질의 횟수가 달라졌다. 아저씨가 돌돌 말린 엿을 나무젓가락에 대충 얹어 건네면, 침을 꼴깍이며 구경하던 아이들의 눈동자가 친구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엿 덩이를 따라갔다.


돈 달라고 떼쓸 엄마가 집에 없는 나 같은 아이들은 동전 말고 다른 것을 들고 왔다. 폐품이었다. 빈 유리병이나 날짜 지난 신문지는 골목시장에서 활발하게 유통되는 유가증권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고물 장수에게 소금으로 바꾸려고 모아둔 할아버지의 소주병을 몰래 빼돌려서 생강엿 장수에게 가져다주곤 했다. 신문보다는 유리병을, 소주병보다는 맥주병을 더 비싸게 쳐주었다. 들고 온 것을 흘끗 보고는 엿장수는 또 나름의 환산식으로 대패질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엿장수 맘대로다.  


지금은 호프집 기본 안주로 등장하는 마카로니 뻥튀기나, 이쑤시개로 솔솔 돌려 빼면 가래침 같은 빛깔의 몸채가 쏙 빠지는 소라, 국물 맛이 일품인 번데기 같은 것들도 집구석에 굴러다니는 폐품을 모아 오면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맛볼 수 있었다.  


한 번은 옆 골목 경신이가 생강엿 장수에게 엄마 금반지를 내민 적도 있었다. 급한 마음에 엄마 경대를 몰래 뒤진 것이다. 경신이가 반지를 내밀자 아이들의 입이 동시에 떡 벌어졌다.


- 와! 금이다!


금반지면 대패질을 열 번도 넘게 하지 않을까? 아니 스무 번? 아니아니 백 번? 두세 번 대패질에 감질나던 아이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금반지의 등장에 한껏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아저씨는 엿 대신 경신이 머리에 세게 꿀밤을 먹였다.


- 한 번만 더 이런 거 가져오면 혼 난다!       


거리에는 온갖 물건을 파는 장사꾼들의 소리가 종일 넘쳐났다. 마이크나 확성기가 없던 시절이라 그들이 기댈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목청뿐이었다. 같은 말을 종일 반복하다 보니, 호객의 소리에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과 가락도 생겨났다. 계란이 대표적이다.       


- 계란이↗ 왔어요↘     


구레나룻을 기르고, 쑥색 조끼를 즐겨 입고 다니던 그는 우리 동네에서 10년도 넘게 계란 리어카를 끌었다. 처음에는 생목을 쓰다가, 나중에는 빨간 메가폰을 구해서 거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응답하라 1988>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쌍문동 라미란 여사의 집 앞을 지나던 그 ‘계란이 왔어요’는 10년을 하루같이 우리 동네를 들르던 그 계란장수의 리듬이었기 때문이다.


- 어? 저 목소리! 우리 동네에서도 저랬는데?


드라마를 보다가 내가 신기한 듯 놀라자, 남편도 맞장구를 쳤다. 우리 동네도! 당연히 그는 나와 전혀 다른 곳에서 나고 자랐다. 우리 동네 계란 아저씨가 홍길동처럼 분신술을 써서 전국 팔도를 장악했거나, 아니면, 소비자는 모르는 ‘전계련’이라는 단체에서 상품의 통일성을 위해 규격화된 징글을 정하고 배포했거나, 그도 아니면 까마득한 지리적 거리를 넘나들며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구비문학의 신비한 파급력이 계란송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니 계란뿐이 아니었다.     


- 메밀↗묵↘ 찹쌀떡→

- 금이↗빨이나 시계↘ 팔아요→     


모두 다른 사람이 각자의 구역에서 자기 손님을 부르는 이 소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며 한반도 전역에서 같은 가락으로 울려 퍼졌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아이들이 국토의 끝과 끝에서 같은 노래에 맞춰 고무줄을 뛰고 놀았던 것처럼.       


이동식 놀이공원 역할을 했던 말타기 포장마차,

100원만 내면 하늘로 붕붕 날아오를 수 있었던 학교 앞 트램펄린.

어쩌다 둘이 한 배를 탄 것인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은 겨울밤의 메밀묵과 찹쌀떡 콤비.

몇 달에 한 번씩 나타나 동네 모든 칼날의 검기를 벼리던 바람의 협객 칼갈이.      


그 때는 대문 하나만 열면 아는 얼굴과 만날 수 있었다. 물건을 파는 사람, 물건을 깎는 주부, 담소하는 이웃, 마실 나온 노인, 공터에서 뛰어노는 아이.  


오늘처럼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에는 간간히 아이들을 태운 학원 셔틀만 오갈 뿐, 아파트 단지 사잇길은 지나는 사람 하나 없이 고즈넉하다.

이런 날이면 가끔,

북적거리고, 왁자지껄하고, 흥성거리던

80년대 끝자락 그 골목의 활기가 그리워진다.



* 이미지 - blog.naver.com/manpw333/220852756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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