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양배추 인형이라는 것이 대대적으로 유행한 적 있었다. 곱슬곱슬한 털실을 머리카락으로 나풀거리는 헝겊 인형이었다. 대갈장군 정도의 이름이 더 어울리는 2등신 인형이었는데, 어째서인지 공식 명칭은 양배추 인형이었다.
인형을 가지고 놀 나이는 한참 지났건만 아이들은 무엇에 홀린 듯 너도나도 학교에 인형을 가지고 왔다.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비슷한 것을 계속 사 모으는 아이도 있었다. 인형이라니. 유치하게. 그저 바라보거나 쓰다듬는 것 외에 별 쓸모를 찾기 어려웠기에, 나는 꼬맹이 시절에도 인형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다른 애들이랑 내기하며 놀 수 있는 딱지나 구슬이라면 또 몰라.
하지만 얼마 후 나 역시 양배추 인형을 사랑하게 된다. 현정 때문이었다. 현정은 우리 반에서 제일 친해지고 싶은 친구였는데, 그 애 별명이 양배추 인형이었다. 짧은 곱슬머리가 양배추 인형을 닮았다면서, 아이들은 현정을 양배추라 불렀다. 일부러 파마를 한 건지 원래부터 곱슬머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프로 헤어를 헬멧처럼 머리에 얹고 다녔다. 아이들은 양배추 인형에 열광하듯, 현정을 좋아했다. 빼빼 마른 몸집에 중전마마의 가채처럼 머리만 커다랬기에 멀리서도 자꾸 눈길이 갔다. 자꾸 쳐다보았더니 어느새 양배추는 내 친구가 되었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매우 가까웠다. 엄마의 표현을 빌자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준비물을 까먹은 날에는, 쉬는 시간 잽싸게 집에 다녀오는 것도 가능했다. 현정은 다른 동네 아이였다. 우리 집이랑 행정구역도 달랐다. 집에 가려면 찻길을 세 번이나 건너고, 커다란 시장을 지나 굽이진 길을 한참이나 걸어야 했다.
현정의 손을 잡고 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던 그 동네로 매일 여행을 떠났다. 만화책 때문이었다. 그 애는 네 자매집 막내딸이었는데, 세 명이나 되는 언니 덕분에 벌써 중학생의 성숙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고 학교에 왔고, 내가 모르는 것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 친해지자마자 현정은 내게 물었다.
- 너는 무슨 만화 좋아해?
난감한 질문이었다. 과자나 과일도 아니고, ‘무슨’ 만화를 좋아하냐는 질문은 대관적 무슨 뜻인가. 지금까지 내가 본 만화라고는 가끔 아빠가 기분 좋을 때 사들고 온 ‘소년중앙’이나 ‘새소년’같은 어린지 잡지의 연재만화와, 중앙일보의 마지막 장 바로 앞면에 실린 네 간짜리 ‘왈순아지매’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껌 대신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만화 풍선껌의 미니 만화도 추가!)
현정의 질문에 그동안 읽었던 만화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신문수의 ‘로봇 찌빠’, 길창덕의 ‘꺼벙이’, ‘순악질 여사’, 이상무의 ‘달려라 꼴찌’, 윤승운의 ‘맹꽁이 서당’, 박수동의 ‘고인돌’... 그렇다면 정답은 바로 명랑 만화! 읽으며 혼자 키득거릴 수 있는, 명랑한 주인공들의 명랑한 말썽을 그린 만화들이다.
하지만 나의 발랄한 만화 취향을 듣고 현정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나는 그런 거 안 좋아하는데...
그렇게 여행이 시작되었다. 목적지는 만화가게. 시장 구석의 외딴 건물 지하에 놀라운 세상이 숨어 있었다. 처음으로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곰팡이 냄새 나른하고 광장처럼 넓은 공간 가득, 하늘의 별만큼 무수한 만화책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처음 온 자라면 압도적인 책 무더기 앞에서 무엇부터 골라야 할지 난감했겠지만, 나는 아무 걱정 없었다. 현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뭘 읽고 싶냐는 그 애의 상냥한 질문에 나는 소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너무 긴 거는 힘들지 않을까? 한 권짜리도 있지?
똑같은 제목에 일련의 번호를 달고 늘어선 시리즈의 책들에 나는 미리부터 기가 죽었다. 잡지책의 연재만화는 한 번에 제공되는 분량이 10페이지를 넘지 않았었다.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 끝나버리는 바람에 읽는 자의 뒷목을 잡게 한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어린이의 이해력과 지구력으로는 그 정도의 서사가 적당했다.
- 한 권짜리는 거의 없어. 적어도 다섯 권은 넘어. 길어야 재밌지. 그러면 너는 일단 이것부터 봐.
현정이 건넨 것은 한승원의 <다섯 번째 계절>. 깔끔하게 한 권으로 마무리되는 단행본이었다. 나의 첫 순정만화. 멀리서 사춘기 센티멘털리즘의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요약하자면 내용은 이렇다.
여고생 은비는 엄마가 운영하는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인 진하에게 반한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대학생 진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즐겨 듣는다. 사소한 오해도 있었지만 다 풀리고 마침내 둘은 미래를 기약한다. 한 권에 담을 수 있는 우여곡절은 그것이 전부였다.
천진한 어린이의 영혼에 진도 8의 강진이 몰아쳤다. 한 장을 읽고 한숨 쉬고, 다시 한 장을 읽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느 것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었다. 쏟아질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는 왕방울 눈동자, 여백을 채우며 봄비처럼 흘러내리는 서정시, 뜬금없이 허공에 나부끼는 꽃잎.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달콤쌉싸름한 우울이 화염병처럼 폭발했다. 이런 세상이 있었다니.
동화의 세계가 야무지게 닫혔다. 그림형제나 안데르센이 들려주던 먼 나라 공주의 사연도, 이솝이나 파브르의 종 경계를 넘나드는 캐릭터들도 이런 기분을 유발한 적은 없었다. 발 대신 생선 꼬리가 달린 인어공주의 고뇌를, 목마른 까마귀의 안타까움을 내 어찌 오롯이 짐작하겠는가.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허구. 감정이입을 하고 싶어도 존재론적 한계가 내포되어 있었다.
은비는 아니었다. 지금 저 만화가게 유리문을 열고 나가면 길거리에서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은 (생김새만 빼고는) 나와 비슷한 여자 아이.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이미 나의 영혼은 은비에게 완벽하게 빙의되고 말았다. 그녀의 곁에는 귀엽고 철없는 엄마와 (귀엽고 철없는 엄마라니, 그 설정만큼은 해괴망측했지만!) 착하고 다정한 사촌 오빠, 그 오빠의 잘생긴 친구가 있다. 그 대학생 오빠는 몰려다니며 막걸리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카페에서 ‘비창’을 듣는다. 심지어 그 애는 호적 상의 이름도 명숙이나 영미가 아니라 은비였다. 모든 기호가 완벽하게 로맨틱했다.
- 다 읽었으면 딴 거 골라줄까? 아니면 갈까?
현정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내가 한 권 읽을 동안 한 질의 만화책을 읽어재낀 현정이 마지막 권을 테이블에 던지며 물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미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매일 만화가게로 달려갔다. 참새도 우리만큼 성실하게 방앗간을 찾지는 못했을 것이다. 전문가와 동행했기에, 나는 별다른 시행착오 없이 관객의 평가를 통과한 명작의 오솔길을 착실하게 걸어갔다. 상기된 표정으로 익숙한 소파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면, 현정이 자기가 읽을 책과 내가 읽을 책을 알아서 골라왔다.
김동화, ‘내 이름은 신디’, ‘목마의 시’, ‘아카시아’.
이미라, ‘인어공주를 위하여’.
이진주, ‘하니를 백작 품에’, ‘하니와 호라스 왕자’.
이혜순, '자매의 창', ‘오빠에게’
김혜린, ‘북해의 별’
김영숙, ‘갈채 시리즈’.
그리고 황미나. ‘너의 이름은 Mr. 발렌타인’, ‘아뉴스데이’, ‘불새의 늪’.
마침내 나는 12년 인생 최고의 걸작을 만난다. <굿바이 미스터 블랙>. 몹시 위험한 책이었다. 멋모르고 첫 페이지를 넘긴 다음, 급성 열병에 감염된 듯 심각한 가슴앓이가 시작되었다. 나는 저 아름다운 미스터 블랙에 홀딱 반해버렸다. 첫 만남에 내 영혼을 강탈해 버린 그는, 이후로 배신, 실연, 누명, 고문 등 인간에게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시련을 백화점 쇼핑하듯 골고루 맛보며 살아간다. 어쩌다 그렇게 가혹한 팔자를 타고 났는지.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내가 죽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농축된 슬픔이 심장을 옥죄었다.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에드워드 다니엘 노팅그라함. 기품이 넘치고, 외우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빈 종이에 그 이름을 몇 번이나 쓰고 또 썼는지 모른다.
수업을 들으면서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가 생각났다. 열두 겹 중첩된 권모술수와 휘몰이 장단으로 몰아치는 불행에 맞서, 마침내 백만돌이 건전지처럼 살아남아 운명적 사랑을 쟁취하는 미스터 블랙. 이런 것이 진정한 어른의 삶이구나. 허황된 만화의 세계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 속에 파묻혀 홀로 비장했다.
책 속에 고개를 처박고 현란하게 눈동자를 굴리다 보면 어느새 현정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가야 할 시간이었다. 때 국물 얼룩덜룩한 소파에서 떨어지지 않는 몸을 일으키고, 주머니 속 동전을 모조리 털어 주인아줌마에게 내밀고, 우리는 깜깜해진 계단을 거슬러 올라왔다. 아련한 슬픔이 어둑어둑한 거리에 넘실거렸다. 초등학생이 돌아다니기에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어쩐지 헤어지기 아쉬워 우리는 팔짱을 끼고 시장 골목 여기저기를 헤매었다. 아직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마음속에서 펄떡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가까운 이웃이라도 되는 양, 우리는 책 속 그들에 대하여 얘기하고 또 얘기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유한 스토리도 늘어만 갔기에, 하고픈 말도, 나누어야 할 마음도 점점 많아졌다. 현실에는 없지만 마음속에 또렷이 살아 숨 쉬는 그들을,우리는 함께 미워하고사랑하고그리워했다. 돌아가야 할 집구석은 순정만화 속 세상과 달리 비루했고, 오늘도 내 일상에는 아무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지만, 친구가 곁에 있어 그 모든 시간이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우리는 결국 다른 중학교로 배정되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더 슬펐다. 배정표를 받은 날, 현정과 나는 두 손을 맞잡고 소리 내어 울었다. 어떤 이별에도 그날처럼 순수하게 절망한 적은 없었다. 미스터 블랙과 스와니처럼 둘만 아는 그곳에서 매일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어린 깜냥에도 헛된 다짐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이제 막 사춘기의 문이 열리려는 찰나였는데, 그 문 너머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도저한 상실감이었다. Good bye. Mr. Black. Good bye. my fri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