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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도리 Apr 06. 2022

계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회사 동료가 엄마가 되었다. 강남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럭셔리했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살림도 육아도 어설플 것 같은 표정. 나는 농담처럼 물었다. 설마 애기 굶기는 건 아니지?

한참이나 깔깔거리던 그녀가 대답했다.


- 진짜 이 세상에 계란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 말에 나도 빵 터졌다. 맞아, 우리에게는 계란님이 계셨지! 어느 집이나 비슷한가 보다. 그건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남편에게 백만 번쯤 했던 말이다. 계란 없으면 얘네들은 어떻게 키워?


저 밤벌레 같은 팔뚝과 미나리처럼 쑥쑥 길어지는 종아리, 나풀나풀 흩날리는 머리카락. 내 아이의 몸을 만든 단백질과 칼슘 중 상당량은 계란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그토록 자주 먹으면서도, 한결같이 질리지 않는 음식이 세상에 또 있을까?


드라마에서도 비슷했다. 몸이 상한 자식의 숟가락 위에, 밥 좀 잘 먹고 다니라면서, 부모가 제일 먼저 얹어주는 반찬도 계란말이다. 화면 속에 초록과 빨강이 점점이 박힌 계란말이가 보이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매번 군침이 돌았다. 어릴 때는 계란말이가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친구의 도시락 통에서 블록처럼 정갈하게 잘린 계란말이가 등장하면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도대체 계란에 무슨 짓을 한 거지?


엄마는 주로 프라이였다. 아침이면 엄마는 동생의 머리를 빗기고, 밥상을 차리고, 도시락을 싸고, 출근 준비를 했다. 이 때, 가장 부족한 것은 시간! 엄마는 번갯불에 콩을 는 대신 계란을 튀겼다. 계란 프라이는 계란말이보다 세 배쯤 빨리 만들 수 있다. 기름을 두르고, 가스불을 한껏 높이고, 계란을 폭탄처럼 투하하면 끝. 1분 컷이다. 소금만 몇 번 꼬집어 던지면, 나머지는 불이 맡는다. 계란이 익기를 기다리면서 숟가락을 놓거나 밥을 푸면 된다.


TV에서 어느 배우가 계란 프라이 맛있게 만드는 노하우를 공개한 적 있다. 불을 최대로 줄이고 서서히 익히는 것이 포인트였다. 프라이팬에 고작 계란 몇 개를 깨뜨려 넣고 그는 대단한 요리라도 기다리는 것처럼 신중하게 그것을 주시했다. 과연 인내심으로 익힌 그의 계란은 얼핏 보아도 푸딩처럼 보드랍고 야들야들했다. 이까짓 게 무슨 노하우씩이나! 코웃음을 치려다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진득하게 프라이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엄마의 프라이는 가장자리가 비닐처럼 파삭했다. 노른자는 딱딱했고, 흰자는 질겼다. 포크로 가운데를 찌르면 소보루빵처럼 들고서 한입씩 잘라먹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그것에 대해 한 번도 문제의식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계란은 계란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계란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반찬이었고, 질기거나 딱딱하다고 해서 그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5학년 때였나? 엄마에게 정식으로 민원을 넣은 적도 있었다. 나도 계란말이가 먹고 싶다구. 프라이 말고!! 친구가 싸온 요염한 계란말이에 홀딱 반한 다음날이었을 것이다. 의외로 엄마는 선선히 대답했다.


- 알았어. 만들어 줄게. 뭐 어렵다구.


다음날 엄마는 계란과 소금을 섞어 프라이팬에 붓고는... 말아 주었다.

이게 아닌데! 내가 말한 계란말이는 알록달록하고, 단정하고, 단면이 직사각형이고, 아무튼 더 멋진 건데... 이건 계란말이가 아니고, 그냥 말린 계란이잖아!


이렇게 노랗기만 한 건 계란말이가 아니라고 (바쁜 아침이라 눈치가 보였기에) 나는 소심하게 쫑알거렸다. 다음날, 두둥~ 진화된 계란말이가 밥상에 등장했다. 심심한 단색이 아니라, 노랗고 까만 김말이였다. 어제처럼 똑같이 팬에 계란물을 붓고는 그 위에 냉큼 김 한 장을 올린 것이다. 5초의 시간을 더 투자하니 과속방지턱을 닮은 화려한 계란말이가 탄생했다.

대만족! 비록 내가 고대했던 당근과 파가 어우러진 영롱한 삼원색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두 번에 한 번은 젓가락으로 집어 올린 계란이 국수처럼 줄줄 풀려버리기도 했지만, 상관 없었다. 그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아침 시간에, 요리에 잼병이었던 엄마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계란말이는 반찬과 안주의 범주를 넘나드는 대표적 메뉴 중 하나다. 밥은 됐고, 술이나 한잔 하지 뭐. 밥이든 술이든 하나만 허락했던 20대의 지갑. 우리는 두말없이 술집을 선택했다. 그러면서도 빈 속에 술은 찝찝했던지 누구 하나는 꼭 계란말이를 외쳤다. 테이블에 특대형 계란말이가 도착하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면서, 미리부터 배가 불렀다.


- 이 정도 크기로 만들려면 대충 몇 알이 필요할 것 같아?


다른 안주에는 계산할 엄두도 못 내면서, 우리는 계란말이만 보면 자동으로 원가를 따졌다.


- 다섯 개? 여섯 개? 아무리 넉넉 잡아도 열 개는 안 들어 가. 보면 알아.

- 그럼 여섯 개라고 치고, 야~~ 그럼 도대체 이게 얼마를 남겨먹는 거야?

- 앞으로는 집에서 해 먹어야겠네. 이까짓 계란말이야 어려울 거 뭐 있어.


어딘가 달착지근한 것이 밥반찬으로 만났을 때와는 묘하게 다른 맛의 계란말이를 앞에 두고, 우리는 라면 다음으로 자신 있는 요리가 계란말이라고, 저마다 큰소리를 탕탕 쳤다.

 

- 그치그치. 다른 건 몰라도 계란말이는 자신 있다니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먹은 계란이 만 개도 넘을 걸?

- 그러게 말야. 앞으로는 집에서 해먹기 힘든 걸로 시키자. 맨날 먹는 계란 말고.


원가보다 열 배쯤 비싼 계란말이 안주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허기진 날 우리는 또 자연스럽게 계란말이부터 찾곤 했다.


자가진단 키트에 우울증 두 줄이 선명한 날, 비극적 낯빛으로 친구를 끌고 찾아간 주점에서, 어느새 파이팅 넘치게 안주빨을 세우게 만든 주범도 바로 격자무늬 케첩이 선명한 계란말이였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블로그 amam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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