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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도리 Sep 08. 2023

소설-데드리프트 10. <최종>

#10. 다시 데드리프트




다시 데드리프트


넓은 북카페 한쪽 벽은 책 대신 맥주 냉장고가 차지했다. 책꽂이처럼 날렵한 냉장고 다섯 대가 나란히 줄 지어 있다. 맥주를 만들 줄 아는 나라에서는 모두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 냉장고 속은 세계 맥주 박람회를 방불케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양한 맥주캔이 종횡을 맞춰 늘어섰다.  


나머지 벽은 책꽂이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고르고, 카운터에서 안주를 주문하고, 책꽂이에서 책을 뽑아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경제적 동선이었다. 누구도 크게 떠들지 않았다. 노트북을 들여다보거나, 골라온 책에 머리를 파묻고 맥주를 홀짝거릴 따름이었다. 일인용 탁자는 낮은 소파에 엉덩이를 파묻은 사람들의 앉은키에 최적화된 높이로 주문제작된 듯했다. 푹신한 소파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면 몸이 꺼질 듯 가라앉았는데, 희한하게 테이블 위의 책이나 노트북은 안성맞춤으로 읽기 편했다.


진영은 닭꼬치를 주문한 뒤 칭다오 맥주를 꺼냈다. 양꼬치를 팔지 않으니 꿩 대신 닭, 아니 양 대신 닭이었다. 책꽂이에서 만화책 한 질을 집어 들고 자리로 돌아온 진영은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사물이 어디에 있는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안주를 주문하고 맥주를 선택하고 책을 고르는 진영의 동작에는 망설임이 없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안주와 맥주도 신속하게 바닥을 드러냈다.


읽던 책을 엎어놓고 진영은 다시 소시지를 주문하고 하이네켄을 꺼내 온다. 진영의 부름을 예견하고 있었던 양 안주는 진영이 자리에 앉는 것과 동시에 테이블에 도착했다. 다시 새로운 만화책을 가져왔다. 2배속 재생화면처럼 빠른 속도로 책장이 넘어갔다. 종종 진영의 눈빛에 야비한 기운이 서리거나 사나운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기도 했다. 심상치 않은 페이지를 넘기는 중인 듯했다.


포크로 접시를 더듬던 진영은 어느새 텅 비어 버린 접시를 확인하고는 다시 일어선다. 이번에는 치킨타코와 코로나다. 서빙하던 점원이 안주와 함께 잘게 썬 레몬 조각을 내오자, 진영은 여전히 눈을 만화책에 고정한 채 한 손으로 레몬 절편을 코로나 병에 쑤셔 넣는다. 이후로도 망고샐러드와 산미구엘을 거쳐 문어포에 아사이마저 클리어하고 나서야 맥주와 함께 떠나는 세계 일주는 마무리되었다.


테이블에는 한 무더기의 만화책이 쌓였다. 그 옆에서 진영은 노트를 꺼내어 메모를 시작했다.

지난달에 사무실로 보낸 스토리는 권모술수와 풍자성은 좋았으나, 직장생활의 짙은 페이소스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결국 채택되지 않았다. 고립감과 일체감이라는 이율배반적 감정을, 닭강정 위의 땅콩 고명처럼 뿌려주는 것이 오피스물의 필수조건이라 것이다. 총탄이 오고 가지 않을 뿐 서로 죽이고 빼앗는 결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직장은 전쟁터와 다를 바 없다. 독자는 그 가혹한 직장생활 속의 암투와 서스펜스를 기대하지만, 동시에, 그 혹독한 환경 속에도 돌 틈에 피어나는 민들레처럼 동료애와 헌신이 숨어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원한다는 것이다.


오래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분적 에피소드만 차용한다는 조건으로 그나마 몇 푼 안 되는 원고료의 절반만 입금되었다. 오피스물은 소재가 고갈되어 이제는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진영은 섭섭한 마음을 다독였다. 사실 매 페이지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화 속 세상과, 영혼이 이탈된 육신으로 사무실에 앉았다가, 때 되면 퇴근하는 월급쟁이의 하루가 어디 어울리기나 한 조합인가.


학원물이나 로맨스는 영원히 인기가 시들지 않는 장르이기는 하지만 진영의 전공 분야가 아니었다. 학창 시절은 생각만 해도 우울했고, 연애의 감정은, 과연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존재한다는 풍문이 사실일까, 싶을 정도로 진영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제는 무슨 얘기를 해도 남들이 먼저 다 해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 진영은 종종 막막함을 느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노트 한 권을 들고 무작정 거리를 쏘다니다가, 홀로 술집 창문을 기웃거렸다.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끄적이며 술병을 비우면, 어떤 날은 기쁨이 또 어떤 날은 슬픔이 찾아와 진영과 대작을 했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그것들과 술잔을 주고받다 보면 어느덧 목청이 커지거나 왈칵 눈물이 솟구치는 날이 있었다. 진영은 그 환희와 비애도 노트에 담았다. 감정이 격해지면 그런대로 맛이 있었고, 잔잔하면 또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다. 그것도 그녀는 노트에 담았다.


노트의 새로운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눌러 펼치며 진영은 생각에 잠긴다. 이제 또 어떤 세상으로 출발할 것인가. 모두에게 익숙하지만 모두에게 낯선 세상. 누구나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아직 들려줄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는 세상. 직장도, 연애도, 학창 시절도 다 그런 세상이다. 살면서 한 번은 거쳐가는 그곳에,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고 남루하고 외롭던 제 모습을 감춰 두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진영은 창 밖을 바라본다. 퇴근 무렵의 거리에는 행인을 부르는 네온사인들이 유혹의 색채를 흩뿌리며 깜빡였다. 카페, 식당, 술집, 모텔, 피트니스 센터.

마침내 진영은 생각이 정리된 듯 펜을 집어 든다.


데드리프트.


이제는 몸에 대한 이야기다. 죽음을 들어 올리는 마음으로 삶과 맞서기.


바벨은 늘 뻣뻣하고 뻔뻔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무거워졌다. 원판을 하나씩 벗어던지며 무게를 줄여가는 방법을 데니는 일러준 적 없다. 애써 무게에 적응해도 원판은 휘청이는 쇠기둥에 야금야금 추가될 뿐. 점점 육중해지는 바벨 앞에서는 두려움과 고통에 적응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처법이었다.


그런 면에서 데드리프트는 진영의 삶과 비슷했다. 데니에게 좀 더 시간을 허락했다면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을까. 누군가와 나눠들거나, 요령껏 회피하는 꼼수라도. 지금까지의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었다. 이번 전쟁터는 내 몸이다. 모두에게 익숙하지만 누구도 완벽한 승자가 될 수 없는 싸움.


진영은 짐짓 결의에 가득 차 엄숙해진다. 비장함이 임계치에 도달했을 때, 진영은 습관대로 노트에 첫 구절을 적어본다. 그 글귀를 따라 진영은, 아니 진 혹은 영이, 새로운 항해를 시작할 것이다.    

  

- 진이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한 것은 좀 더 가벼워지고 싶은 바람 때문이었다.


 <끝>



*image=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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