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드라마

by 고작가

드라마를 즐겨 본다. 보통 드라마는 주부들이 즐겨 본다고 생각하지만, 하루를 치열하게 보내고 나면 맥주 한 잔을 마시면서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편안한 게 없다. 더구나 요즘처럼 집콕생활을 해야 할 때면 평소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몰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드라마 ‘도깨비’를 보며 나이에 안 어울리게 판타지 사랑을 꿈꿔보고, ‘미스터 선샤인’을 보고 잊고 있던 애국심도 깨워본다. ‘킹덤’을 보며 다가올 미래를 걱정해 보기도 한다. 꼬맹이가 재미로 보던 만화는 어느덧 중년이 된 지금, 고된 삶의 피난처가 되어준다.


그러고 보니 본방사수를 하지 못하면 재방송이나 유튜브, 넷플릭스로 다시 보기를 하고 있지만, 이런 방법이 없던 시절에는 인기 드라마가 국민들의 생활 패턴을 바꾸기도 했었다. 예를 들면 1995년에 방영됐던 당시 최민수와 고현정이 나왔던 드라마 <모래시계>. 당시엔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려고 귀가를 서두른다고 해서 ‘귀가시계’라고 불리기도 했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길에 다니는 사람을 보기 힘들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는데 이런 걸 보면 드라마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큰 행복감을 안겨주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본 드라마 중에 인생 드라마를 꼽으라면 <응답하라 1988>이다. 다시 보기, 재방송, 특별 편성으로 적어도 3번 이상은 본 것 같다. 대사를 외울 정도로 다 아는 내용인데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건 아마도 드라마를 보는 것이 아니라 1980년대, 그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인가 보다. 드라마는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서 잠시 현실의 무게, 어른의 무게를 내려놓게 해 준다.


그 시절 나는 엄마가 석유곤로 위에서 해주신 냄비밥과 된장찌개를 밥상으로 받아 들고,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맛나게 먹었다. 비좁은 교실에선 까까머리들이 모여 서로의 반찬을 펼쳐놓고 다 같이 쉬는 시간 도둑밥을 먹었고, 아버지 월급날이면 누런 종이봉투에 담긴 따뜻한 전기구이 통닭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드라마 안에 있었다. 추운 겨울날 아침, 장독대에서 살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 국물과 무를 꺼내와선 삶은 감자와 고구마로 아침을 먹는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군침이 삼켜졌다. 이제는 맛볼 수 없는 시간들. 통닭이 담긴 종이봉투를 든 아버지도 지금 우리 곁엔 계시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덧 40대 중반이 된 내게 추억팔이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드라마는 참 소중하기만 하다.


<응팔>에는 요즘 아이들이 모르는 ‘워크맨’도 나온다. 드라마에서는 여주인공이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에 친구들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천신만고 끝에 상품으로 걸린 워크맨을 획득하는 장면이 있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당시 워크맨은 연령과 성별을 불문하고 모든 학생들이 가장 원했던 최애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원하는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두고 듣지만, 당시만 해도 테이프를 사서 듣거나 라디오에서 기다리던 노래가 나오면 공테이프에 엄청나게 공을 들여 녹음을 했더랬다. 나도 아버지가 생일선물로 사 주신 워크맨, ‘마이마이’를 보물 1호로 삼았는데, 선물을 받아 든 처음 몇 개월 동안은 정말 씻을 때를 빼놓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일까, 그때 들었던 노래가 나오면 30여 년이 지났음에도 나도 모르게 나지막이 가사를 읊조리며 따라 부른다.


다른 사람들은 중년 남성이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하면 의외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만약 중년 남성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면 그건 잠시 세파에 시달린 마음을 뉘이고 말리는 중이라고 봐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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