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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이빙, 춤, 영화, 연극, 영어

by A록

고등학교 때는 그냥 모든 것이 만만했다. 그래서 대학도 그럴 줄 알았다. 마음껏 놀 준비를 하기 위해 머리 염색을 하러 미용실에 갔다. 빨간색, 노란색, 블루블랙은 해봤으니까 좀 더 색다르게 하고 싶다고, 올 해 대학 신입생이라고 미용사 언니한테 얘기했더니 알겠다고 잠시 고민을 한 후에 헤어쇼에 나갈 법한 화려한 머리를 만들어줬다. 4단 염색이었다.


나도 놀래고 거기 있던 할머니들, 아줌마들도 다 놀랬다. 안쪽부터 노랑, 주황, 진한 주황, 붉은 갈색이 차례대로 앉혀진 난생 처음 보는 머리였다. 머리카락이 움직일 때 마다 안쪽에 다른 색깔이 보이는데 너무 멋있어서 소리를 꺅 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머리를 하고 집에 갔더니 아빠가 화들짝 놀라시며 한마디 하셨다. “와! 장닭 머리다!”

예상대로 그 머리는 학교에서 히트를 쳤다. 선배들이 나에게 와서는 머리카락 한 번 뒤로 넘겨봐 달라, 머리 한 번 흔들어봐 달라, 난리였다. 나는 부끄러운 척 하며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흔들고 넘기고 다 했다. 흐뭇했다. 대학 생활의 꽃이라는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스킨스쿠버’동아리였다.


수영을 좋아하는 나에게 이만한 동아리가 없다 싶어서 단번에 결정을 했는데 고등학교 동창이랑 같이 동아리방에 찾아가 문을 열었더니 법학과 신입생이라는 남자 아이 한 명이 선배인양 앉아있었다. 생양아치였다. 머리는 탈색을 해서 샛노랬고 옷은 극단적인 힙합 스타일이었다. 말투며 눈빛이 재수가 없어서 동아리를 바꿔야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식품영양학과에서 여학생 세 명이 더 들어왔다. 다행히 착해 보이는 친구들이었다.


곧 남자선배 두 명과 여자 선배 한 명이 와서는 동아리에 관한 설명을 해줬다. 마음에 쏙 들었다. 우리는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거의 매주 깊이 2미터가 넘는 잠수 풀에서 열심히 훈련을 했고 훈련 기간이 끝난 가을의 어느 날 동해에 가서 바다 다이빙을 했다. 정신없이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다가 선배의 수신호를 보고 수면 위로 올라갔는데 바다 한가운데에 내 몸이 떠있었고 저 멀리 육지가 보였다.


평생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바다에 떠서 육지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말 새로웠다. 그 새로운 경험, 틀을 깨는 경험의 순간의 느낌은 희열과 경이로움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뒤로는 다이빙을 하지 못 했다. 훈련 기간 동안 깊은 물에 들어갈수록 수압 때문에 귀가 아팠는데 바다 다이빙 후로는 귀 상태가 더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동아리를 나왔고 그 재수 없던 놈이랑 신나게 연애를 했다.


영어를 좋아해 영문과에 들어갔던 나는 대학 수업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 했다. 오히려 홍대 앞에 있는 댄스 학원에서 배우기 시작한 재즈댄스에 빠져서 춤을 추기 위해 필요한 근육을 만드는 운동과 춤 연습에 시간과 열정을 쏟았다. 무릎을 쿵쿵 찍는 동작 때문에 양쪽 무릎에 피멍이 들었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무릎 보호대를 끼고 죽어라 했다.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이 학교 안 오고 어디 있냐고 전화를 하면 나는 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거나 집에서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나도 안 되겠다 싶어 다른 학교로 편입을 하려고 어느 무용단의 수석무용수로 있는 삼촌에게 물었더니 무용은 그냥 취미로 하고 영문과에서 졸업을 하라고 진지하게 충고를 하셨다. 졸업 후에 취업이 너무 힘들다는 이유였다. 그럼 안 되지 싶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운동 반 공부 반 으로 시간을 채우며 다니던 학교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휴학 기간 1년을 포함한 5년 동안 대학생 신분으로 온갖 재미있는 짓들을 했다. 사실 그 당시에는 막 재미있어서라기 보다 전공인 영문학을 견디면서 해야 하니까 위로의 행위들로 한 짓들인데 그 딴 짓들이 의외로 나에게 너무 큰 기쁨을 주었다. 가장 첫 번째는 춤이었고 그 다음은 영화와 연극이었다. 재즈댄스 수업이 없는 날에는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영화관으로 달려가 영화를 보거나 대학로 또는 국립극장으로 달려가 연극을 봤다.


어느 극단의 서포터즈 회원으로 가입해서 그 극단에서 공연을 할 때 마다 가서 보고 몇 줄의 평가를 써서 주는 활동도 했는데 그 때 나는 대단한 문화평론가라도 된 듯 완전히 진지한 자세로 시간이 부족하면 밥도 굶어가며 연극을 봤다. 어떤 작품은 어려웠고 어떤 작품은 눈물이 줄줄 났고 어떤 작품은 울면서도 웃었고 어떤 작품은 너무 웃기고 좋아서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예술은 내 삶의 가장 핵심적인 기쁨이었다. 그리고 나를 진정으로 해방시켜주는 위대한 것이었다.


휴학 기간 동안에는 하루에 영어 과외 4개씩, 일주일에 한 번은 새벽에 미용실에서 미용사들 영어도 가르치면서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 돈을 몽땅 털어 여행을 갔다.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배낭여행을 다녔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딴 짓으로 가득한 대학 생활을 마치고 영어영문학과 전공자로 졸업을 한 덕분에 밥벌이를 참 쉽게 잘 했다. 영어 학원 강사를 하면서도 영어 과외를 짬짬이 했고 대안학교 영어교사로도 일을 했다. 영어로 번 돈의 십일조를 무용수 삼촌한테 종종 했다. 마음으로.


글, 그림 by 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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