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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0년 동안의 여행

by A록


여행을 위해 돈을 버는 일은 힘들어도 견디기가 쉬웠다. 하루에 과외 네 개를 하는 날은 중간 쉬는 시간도 없이 이 집 끝나면 저 집, 저 집 끝나면 그 다음 집으로 바로 바로 이어서 했기 때문에 밥 먹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옥수수 강냉이를 한 봉지 사서 가방에 넣고 그걸 수시로 한 주먹씩 집어 먹으면서 다녔다.


하루는 그 날의 마지막 집에서 엄청난 허기를 꾹꾹 참으며 수업을 하고 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엄청 크게 났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강냉이를 봉지 째 꺼내 급하게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 모습을 본 과외 학생이 나를 짠한 눈빛으로 보더니

“쌤, 베리 헝그리한가 봐요. 강냉이 아무리 먹어도 배 안 부를 거 같은데.”

라고 하길래 내가 말했다.

“그래서 물을 마신 거야. 강냉이가 배 안에서 불면 엄청 배불러지거든. 그런데 불기까지 시간이 좀 걸려.”

그런데 강냉이는 그 날 따라 천천히 몸집을 불렸고 과외가 끝날 때쯤이 되어서야 움켜잡고 있던 배에서 간신히 손을 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모은 돈으로 비행기 표를 먼저 사고 나머지 생활비를 벌었다. 비행기 표는 늘 돌아오는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오픈티켓으로 샀다. 내가 언제 돌아오고 싶을지 나도 모르기 때문에 그 날짜를 정할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별로면 빨리 오고, 생각보다 너무 좋으면 눌러 살지 뭐.’ 하는 마음이었다. 오픈티켓이 주는 열린 가능성에는 기대와 불안이 마구 섞여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밥 먹듯이 하는 나를 보고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까웠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서 너무나 자유롭지 못 했기 때문에 외국으로 가출을 한 것이었다. ‘자유로워서’가 아니라 ‘자유롭기 위해서’ 떠난 것이었다. 나는 그 많은 여행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룰루랄라 신이 나서 출발해본 적이 없다. 내가 선택하고 준비한 여행이었지만 시작은 늘 두려웠다. 군대에 입대하는 마음으로 떠밀리듯 울상을 하고 여행길에 나섰다.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타기 전에 나는 항상 집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울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서럽게 흐느끼면서 마지막 밥을 먹고 내 등판 보다 더 크고 맬 때 마다 주춤하는 무겁고 큰 배낭을 짊어진 채 공항 리무진을 타러갔다. 여행을 거듭할수록 여행이 내 계획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새까만 막막함 속으로 눈을 가린 채 더듬더듬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주로 혼자서 여행을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나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다. 어디에 가서 무얼 하고 무얼 먹고 누구를 만나고가 백 프로 내 마음대로였다. 그런데 늘 외롭고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피곤해서 그 자유를 만끽하기가 힘들었다. 애써서 어느 유명한 미술관에 찾아갔는데 너무 배고프고 피곤한 나머지 미술작품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졸다보면 문 닫을 시간이 되거나 숙소로 돌아가는 차를 타야 되는 시간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외로움은 또 얼마나 지독한지 내가 보는 풍경이 멋있을수록, 맛있는 걸 먹을수록 더 괴로웠다.


그런데 여행 경력이 쌓일수록 그 외로움을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조금씩 늘었다. 현지에서 만나는 한국인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고 여행 루트가 맞으면 같이 이동을 하면서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지인들과 친해질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다가가 친구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랬더니 여행이 덜 외롭고 더 재미있어졌다.


하지만 소화불량에 관해서는 시원한 답을 못 찾았다. 한약도 먹고 수지침을 배워서 직접 내 손에 침을 놓고 요가도 열심히 했지만 확 나아지지가 않았다. 특히 밀가루 소화를 잘 못 해서 빵이 주식인 나라에서 빵을 잘 못 먹는 게 참 불편했다. 요리를 할 수 있는 숙소에서는 최대한 밥을 지어먹었는데 나가서 돌아다니는 낮에는 간편한 음식을 사먹을 수밖에 없으니 내가 많이 먹은 건 슈퍼마켓에서 파는 유산균 음료와 비스켓과 땅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비타민이 풍부한 과일을 먹으면 좋았을 걸 싶은데 그 때는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꼭 먹어야한다고 생각을 했다.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건데 영양이 부족하면 손톱에 무늬가 생긴다. 2-5mm의 작은 반달무늬. 그리고 손톱 주변이 너덜너덜해진다.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가는 야간 기차 안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가 알려줬다. 끝없이 펼쳐지는 들판을 배경으로 같이 무료하게 손톱을 깎으며 대화를 시작했는데 내 손톱을 힐끗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손톱 그거, 영양 부족 때문이야.”


그리고는 가방에서 샤그락샤그락 소리가 나는 과립형 비타민C 봉지를 몇 개 집어서 나에게 건네며 또 말했다.

“이거라도 먹어. 하루 세 끼를 든든히 먹으면서 다녀야 여행을 오래 할 수 있어. 안 그럼 몸이 아프고, 몸이 아프면 뒤지게 서러워.”

경험담처럼 들렸다. 나보다 두 살 정도 어린 여학생이었는데 필리핀에서 혼자 유학 생활 중에 짬이 나서 여행을 왔다고 했다. 존경한다고 했다.


내가 여행 한 나라는 사이판, 괌, 필리핀, 호주, 태국, 몽골, 터키, 프랑스,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모나코, 일본, 중국, 베트남, 인도다. 이 중에 사이판, 괌, 필리핀은 가족 여행이었고 호주부터가 배낭여행인데 스무 살에 호주로 시작해서 서른 살에 인도로 끝난 딱 10년간의 청춘 배낭여행이었다.


이 중에 프랑스에서는 떼제 공동체에서 몇 주간 머물렀고 영국에서는 브루더호프 공동체에서 몇 주 머물렀으며 중국에서 베트남은 비행기를 타지 않고 육로로 이동을 하기 위해 기차를 32시간 동안 타고 수많은 중국인, 베트남인들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밥과 간식을 나눠 먹었다. 마지막 인도에서는 결혼을 결정한 후에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에서 처녀 장례의식을 치르고 왔다.


나는 10년 동안 '여행'을 조금씩 알아갔고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 오래된 EBS 교양 프로그램 ‘세계테마기행’을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인터넷 강의처럼 열정적으로 필기를 하면서 봤고 여행에 관한 신간이 나오면 얼굴을 파묻고 웃으면서 읽었다. 여행은 나에게 생존을 위한 비상구이자 유희를 위한 테마파크였다.


글, 그림 by 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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