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추면서 영혼의 고삐가 하나둘씩 풀려나갔고 내 생각의 틀도 와장창 깨지기 시작했다. 겉으로만 보면 망나니였다. 세계를 여행하며 사 모은 온갖 스타일의 옷을 걸치고 다니고 앞머리, 가끔은 뒷머리도 내가 마음대로 자르고 다녔다. 서른 살에 대안 학교 교사 생활을 할 즈음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존댓말을 하지 않았고 반말이나 영어로 모든 의사소통을 했다.
학교에서 나는 바지 위에 치마를 겹쳐있고 아이들을 데리고 저수지로, 들로 쏘다니며 영어 수업을 하고 산책을 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와서는 눈썹을 대바늘로 뚫는 눈썹 피어싱을 하고 인도에 가서 담배를 배우고 시가를 피웠다. 여행지에서 나를 보호하거나 싸워야 할 상황이 생기면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고 눈썹에 박힌 피어싱을 보여주며 미간부터 확 구겼다. 꽤 효과가 있었다. 결혼 할 사람이 목사님이고 그 사람의 아버지도 목사님이셔서 주위에서 이런 나를 두고 말이 많았는데 어쨋든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아 모유 수유를 하는데 너무 황당하게 힘들어서 젖 그림을 갈기듯이 그려 거실 벽에 붙이기 시작했다. 당시에 시어머님이 와서 산후조리를 도와주고 계셨는데 어머님은 그 그림들을 분명히 보셨을 텐데도 한마디 말이 없으셨다. 그래서 나도 계속 온갖 형태의 젖을 마음대로 그렸다. 그 그림들은 8년 후인 2020년에 ‘모유 수유가 처음인 너에게’(샨티 출판사) 라는 책이 되었다.
엄마가 된 지 6개월이 지나면서 이상하게 숨이 안 쉬어졌다. 나의 하루 일상이 아이 젖 먹이고 아이 돌보고 자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는 것이 몸서리 쳐지게 괴로웠는데 그런 날들이 쌓이니 공황장애가 온 것이다. 산소가 희박한 공간에 갇힌 것처럼 턱을 쳐들고 눈을 찡그리며 아주 힘겹게 산소를 들이키는 호흡 곤란 증상이 계속되었다.
머리를 밀어버리자고 결심했다. 나에게 어떤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직감이 들어서였다. 고급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밀어달라고 하니 절대 안 된다며 나를 뜯어말렸다. 이유는 고객님은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여성도 삭발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삭발한 후에 내 모습이 정말 마음에 안 들어도 내가 책임질 테니까 밀어달라고 다시 얘기했다. 그래도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밀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아기 젖 먹일 시간이 다가와 버렸고 그럼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짧게 밀어달라고 했다. 갓 입대한 군인 머리가 됐다.
그리고 집에 와서 얼른 아기 젖을 먹인 후에 욕실에 들어가 남편의 바리깡으로 내가 다시 머리를 밀었다.
‘지이잉... 지직! 지이잉... 지직!’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은 참 쉽게 밀던데, 아... 나는 왜 이렇지?'
바리깡이 머리를 여기 저기 다 파먹어버렸다. 피가 나고 땜빵이 생기고 난리가 났다. 다행히 그 때 친한 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아이를 봐주고 있었을 때라 내 뒤통수를 보고는 빨리 미용실에 가서 수습을 하고 오라고 얘기해줬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하는 미용실에 가서 모자를 벗으며 내 머리를 보여드리니 “아유, 어쩌다가! 빨리 앉아!” 하시면서 내가 원했던 빡빡머리로 시원하게 밀어주셨다.
일주일 후, 명절이었다. 시댁에 가야 했다. 남편이 미리 전화로 어머님께 내 머리가 많이 짧으니 놀라지 말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어머님은 “모자 꼭 쓰고 오니라!” 하셨다. 아버님이 그 동네 제일 큰 교회 목사님이시라 보는 눈이 많아 어머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거니 나도 그 정도 예의는 지켜야겠다 싶어 지하상가에 가서 챙이 넓은 밤색 모직 모자를 하나 구해 빡빡머리에 얹어갔다.
집 안에서 쓰고 있기에 적합한 모자가 아니어서 나는 시댁에 들어가자마자 모자를 벗었다. 시부모님은 속으로는 놀라셨을지 몰라도 별 내색을 안 하셨다. 명절 당일 저녁에 큰댁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모자 벗지 마라이.” 나는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 알았다고 했다. 큰댁에서 저녁을 먹는데 너무 더워서 땀이 줄줄 흘렀다. 모자를 조심스럽게 벗어서 내려놓았다.
“옴마야~”
“오메, 뭔 머리가 그라요~”
“형수, 머리가 너무 짧은 거 같은디?”
“아따, 멋지구마이.”
별 얘기가 다 나왔다. 나는 그냥 좀 짧게 잘랐다고 말하고는 계속 밥을 먹었다. 모자를 벗지 않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 해 어머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둘째 출산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영화 ‘와일드’를 보고 코를 뚫었다.
45세에 죽는 주인공의 엄마가
“나는 내 삶을 살아본 적이 없어. 아내와 엄마로 살았어. 내 삶인데, 내 건데 말이야. 시간이 많을 줄 알았어.”라고 하는 대사가 나한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남긴 말을 기억하며 나는 기필코 내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코에 박아 넣은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집에서 둘째를 출산하기 위해 진통을 하면서도 코에 박힌 피어싱이 걱정되었다. 진통을 하다가 푱 빠지거나 쏙 들어가 버리면 어쩌지 고민이 되었다. 진통과 진통 사이 쉬는 시간에 얼른 진주귀걸이를 찾아 갈아 끼워보았다. 콧구멍 보다 더 큰 진주가 코에 붙어있는 모습이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낄낄거리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빼고 작은 코걸이를 다시 넣고 반창고를 잘라 여러 겹으로 붙였다. 진통 간격이 점점 짧아졌고 차에 탈 즈음에는 피어싱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안 날 정도로 고통이 휘몰아쳤다.
새벽 4시 반에 차를 타고 새벽안개를 뚫으며 조산원으로 달려가는 동안 의자에 한 번 앉지도 못 하고 차 바닥에 고양이 자세로 엎드려 라마즈 호흡을 했다. 원래 출산을 하기로 되어있던 조산원은 부천이라 거기까지 가다가는 차에서 아기가 나올 것 같아 출산 교육을 딱 한 번 받은적 있는 용산에 있는 조산원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차는 다행히 출산 전에 조산원 주차장에 도착을 했고 나는 주차장에서부터 조산원까지 극강의 진통을 참으며 겨우겨우 기어가 둘째를 낳았다. 산모도 아기도 피어싱도 무사했다.
둘째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또 시어머님이 오셨다. 피어싱이 박힌 내 코를 안 보는 척 계속 힐끔힐끔 보시길래 내가 얘기했다.
“어머님, 제 코 보시는 거예요?”
“어? 어... 그 그게 뭐냐?”
“코 뚫은 거예요.”
“내 평생 그런 거 처음 본다.”
“사람들이 귀 많이 뚫잖아요. 저는 귀 대신에 코 뚫은 거예요.”
“오메... 별나다 별나. 나는 내 아들만 별난 줄 알았드만 니도 똑~같다.”
그 순간 별난 남편에게 고마웠다. 남편은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나 목사님이 되었지만 빨간 머리의 장발로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고 세계 일주를 말도 없이 훌쩍 떠났으며 그림을 그리고 싶어 홍대 앞에 살면서 그림을 그린, 나와 만만치 않은 망나니의 역사를 가진 사람이다.
큰 아이가 다섯 살, 작은 아이가 세 살쯤 되었을 때 둘이서 어릴 적 앨범을 보다가 삭발한 머리가 밤톨 머리가 되어 첫째를 안고 있는 내 사진을 보고는 자기들끼리 속닥이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누구야?”
“엄......마?”
“아니야. 엄마 아니야.”
“맞아, 아니야. 뭐지? 이 아저씨 누구지?”
나는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너무 웃겨서 뒤에서 배를 잡고 떼굴떼굴 구르다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그거... 나야...”라고 했다.
아이들은 벌어진 입을 손으로 막으며 잠시 충격에 빠지더니
“아하하하하하! 이렇게 못 생긴 아저씨가 엄마라고? 진짜? 엄마 너야?”하며 몹시 즐거워했다.
이렇게 한동안은 힘든 가운데에서도 자유로웠다. 더 자유롭고 싶었고 아이들이 클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글, 그림 by 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