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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래도 최선을 다해 키운다

by A록


하루 종일 치료를 해야 하는 나에게는 한참 뛰어놀고 싶어 하는 두 아이가 있다. 남편은 집안일을 도맡아 하지만 아이들과 나가서 놀아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에는 안 되겠다 싶어 쑥뜸 도구를 다 챙겨서 한적한 집 앞 놀이터로 갔다. 아이들을 거기서 놀게 하고 나는 치료를 하려고. 쑥에 불을 붙여야 하기 때문에 혹시나 모르는 사람이 와서 보면 불과 연기를 보고 놀랄까 봐 마음을 졸이며 살살 치료를 했다.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모르니 한방을 뜨더라도 확실하게 뜨자는 마음으로 조금 더 많이 태워 뜨겁게 하고 꾹 참았다. 팔꿈치를 뜨는데 손가락 끝까지 열이 전달되면서 찌릿찌릿하는 느낌이 있게 효과가 좋았다. 몇 번 못 하고 다른 아이들이 와서 치료를 멈췄지만 통증은 그런대로 잡혔기 때문에, 무엇보다 아이들이 웃으면서 놀고 있었기 때문에 만족했다. 그날 이후로 주말에는 종종 놀이터에 나가 치료를 했다.

내가 아파서 정말 못 해주는 것들, 머리를 빗어서 묶어주고, 같이 손을 잡고 뛰고, 박수를 쳐주고,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주는, 그런 것들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려고 했다.


무더운 여름날, 땀띠가 잘 나는 아이들이어서 에어컨을 약하게 틀어놓고 잠을 재우는데 나는 에어컨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온 몸의 관절이 들쑤시고 난리가 나는 몸이라 에어컨 옆에 가지를 못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잠들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하고 방문을 쪼금만 열어놓고 방문 바로 앞에 롱 패딩을 입고 앉아 자장가를 불러줬다. 조금 세어 나오는 냉기에도 몸이 아파와서 패딩을 입은 위에 담요까지 덮었다. 엄마가 내년에는 에어컨을 틀어도 너희 곁에 누워서 있을 수 있으니 올해만 이렇게 하자고 달래며 엄마가 곁에 없어 잠이 잘 안 온다는 아이들을 위해 한 시간 내내 자장가를 불러줬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아이들이 잠든 후에도 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앉아있었다.


내가 몸이 아프니 아이들 건강을 잘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저녁 산책을 꼭 했는데 나는 낚시 의자를 들고 아이들과 같이 몇 걸음을 겨우겨우 걸어 나가 긴 길이 시작하는 곳에 의자를 놓고 앉아 아이들이 걷는 것을 보았다. 길의 끝까지 갔다가 뛰어와 두 팔을 벌린 내 품에 한번 안기고 다시 길의 끝까지 걸어갔다가 뛰어오기를 반복하는 것이 우리의 산책이었다. 길의 왼쪽은 귤 밭이었고 오른쪽은 우거진 나무들이 있었으며 바닥은 검붉은 흙이었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길이라 저녁에는 사람도 차도 없는 우리만의 길. 그래서 안전하고 편안한 길.


어느 날은 저녁을 먹고 늦은 밤에 산책을 나갔는데 아이들 걸어가는 걸 보며 앉아 있다가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의 별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15년 전, 스물네 살의 내가 밤에 혼자 택시를 타고 프랑스 시골 마을을 찾아갈 때 차창 밖으로 보이던 수많은 별들이 생각났다. 기차를 놓쳐서 택시를 탄 거라 거리가 꽤 멀었고 택시비가 착착 빨리도 올라가서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와르르 쏟아질 것처럼 무수히 많은 별들을 보는 순간,

‘이걸 보려고 기차를 놓쳤구나! 택시비? 하나도 아깝지 않아! 아, 정말이지 이건 기적이야!’ 하고 생각했었다. 그때의 용감하고 건강하고 빛나던 젊은 내가 생각나서 순간 마음이 찡했다. 그리고 그때도 좋았지만 지금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두 아이가 있으니까. 이렇게 해맑게 웃으며 내 품에 뛰어 들어오는 두 천사가 있으니까 아파도 지금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열무김치를 너무 좋아하는데 손목이 아프고 발목이 아파서 잘 못 해주다가 한 번씩 마음을 먹고 손목 치료를 왕창 한 다음 의자에 무릎을 꿇고 올라가 열무김치를 담았다. 오래 서있으면 발목에 무리가 가서 통증이 아주 심해지기 때문에 발목에 무게를 실지 않으려고 무릎을 꿇는 건데 무릎을 꿇고 있다가 발목으로 서는 순간의 통증이 어마어마했다. 인어공주도 그만큼 아프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할 정도로. 그래서 너무 아프면 서지 못 하고 기어서 내 방으로 들어가 누워있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담은 열무김치를 국그릇 가득 담아 주어도 다 먹고 또 달라고 했다. “이렇게 잘 먹으니 너무 좋다~! 엄마 금방 나아서 맛있는 거 더 많이 해주고 싶다.”하며 아픈 손목을 쓰다듬었다.

어느 날 첫째가 유치원에서 부모님 소개 시간에 엄마를 소개했다고 했다.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정말? 뭐라고 했는데?”

“내가 아까 한 그대로 해볼게. 우리 엄마는 손목이 아프지만 우리를 잘 돌봐줍니다!”

씩씩하게 말해놓고 부끄러워졌는지 헤헤하고 웃는 첫째를 꼭 안았다.

‘알고 있었구나... 다 알고 있었구나...’

눈물이 핑 돌았다. 부족하다고 느낄 줄 알았는데, 돌봄을 잘 받고 있다고 느껴줘서 너무 고맙고 엄마의 애씀을 알아줘서 너무 고마웠다.


내 돌봄의 절정은 아이들이 아플 때였다. 나는 병원에 가서 진단만 받고 와서 쑥뜸으로 아이들을 치료해줬다. 기침감기, 눈병, 편도선염, 장염... 내 몸에 하는 것도 힘들지만 타인에게 해줄 때는 더 많은 손목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손목이 아파서 덜덜 떨며 아이들을 치료했다. 둘째가 기침감기에 자주 걸렸는데 둘째는 몸이 안 좋으면 배와 머리가 같이 아팠기 때문에 쑥뜸 할 부위가 여러 군데였고 여러 군데를 하다 보면 한 군데에 집중도가 떨어져서 낫는 시간이 더뎠다. 그래서 며칠을 붙잡고 해야 할 때도 있었는데 그럼 내 몸은 치료를 못 해서 엉망이 됐다. 그래도 한 방이라도 더 떠서 빨리 아이를 낫게 하려고 내 손목, 내 발목에 쑥뜸할 생각이 안 들었다. 그래서 아이가 나으면 나는 몸살처럼 신열이 오르고 온 몸의 관절이 어그러진 것처럼 아파서 끙끙대다가 정신이 조금 돌아오면 토치를 잡고 쑥뜸을 했다.


아이들 때문에 더디 낫는 거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겨우 나은 손목을, 발목을 또 쓰고 또 썼으니까. 그래도 내 아이의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 여덟 살의 추억과 건강을 최선을 다해 지켜주고 싶었다. 조금 더디 나아도 그 시절 내 아이가 행복하길 바랬다. 그래야 나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아이의 행복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나의 행복은 아픈 내 삶에 큰 위로이자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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