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창피해. 선생님이 무거운 거 들어주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어.”
어느 날 둘째 하늘이가 대뜸 이 말을 했다.
한 달 전쯤 유치원에서 가정에서 놀이할 수 있는 도구를 배부해주셨는데 다른 엄마들은 유치원 입구에서 무거운 쇼핑백을 하나씩 가져가도록 하고 나는 몸이 아픈 걸 아셔서 선생님이 직접 들어다 차에 실어주셨던 상황을 얘기한 거였다.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왜 그때 얘기하지 않았냐고 하니 그때 바로 얘기하면 엄마가 속상할까 봐 말을 안 했다고 했다.
‘하늘이의 창피한 마음, 엄마가 속상할까 봐 말을 못 하고 참았던 마음을 달래줘야겠다...’라고 머리가 생각을 하고 하늘이를 안아주기는 했지만 그때의 내 마음은 솔직히 몹시 피곤했다. 발목이 아파서 당장 한 걸음 한 걸음을 걷기가 고통스럽고 국 하나 끓여서 밥을 먹이려고 해도 손목이 떨어져 나갈 각오를 해야 하는 생존 단계의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아이는 그 보다 위의 단계를 요구하는 것 같아서였다
몸이 유난히 아픈 날에는 더더욱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다.
‘나도 겨우 살고 있고 너희도 겨우 돌보고 있는데 거기다 마음까지 다독이고 얼러줘야 하는 거야? 너무 버겁다 정말...’ 하는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아이들 덕분에 ‘어떻게든 꼭 낫자!’라고 마음을 먹고 열심히 치료를 하지만 아이들을 돌보느라 추가되는 피로감과 육체적 통증 때문에 ‘하루 만이라도 마음 편히 혼자서 아프고 싶다.’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날도 있다.
5년간의 투병 생활 중에 거의 손을 쓸 수 없었던 2년 정도는 남편이 주 양육자 역할을 했는데 투병 기간이 길어지고 내가 손을 어느 정도 쓸 수 있게 되자 그 역할이 스리슬쩍 나에게 넘어왔다. 남편은 빨래나 설거지를 도맡아 했지만 저녁에는 산책을 하러 나갔기 때문에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사실은 스리슬쩍 넘어온 것이 아니라 스리슬쩍 내가 가져왔다. 아이들에게 내가 먹이고 싶은 음식을 먹이고, 깨끗이 씻기고, 말끔하게 입혀서 재우고 싶어서. 몸이 언제 나을지 모르는데 기한 없이 남편한테 집안일에 아이들 돌봄까지 맡기기가 미안해서. 2년간 병수발을 해준 남편이 고마워서 내가 내 몸을 혹사하기로 한 것이다.
조금 더 부탁했어도 되는데. 조금 더 몸을 회복하고 마음의 여유를 찾은 다음에 주 양육자의 자리로 갔어도 되는데. 엄마가 이래야지, 아내가 이래야지, 하는 내 안의 규범과 내가 아이들의 돌봄을 주도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사서 고생을 했다. 남편에게 부탁을 했으면 아이들 마음도 더 잘 보살펴지고 내 몸도 더 빨리 나았을지 모를 일인데 왜 그걸 그렇게 못 견뎌하며 성치도 않은 몸으로 아이들 뒷바라지를 한다고 나섰을까?
엄마도 아프면 쉬어야 한다. 충분히 쉬고 회복해야 한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가정 일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 안다 나도. 아는데 참 그게 쉽지가 않다. 내 손으로 해야 직성이 풀려서 아주 몸져눕지 않는 한 손을 털고 나가기가 어렵다. 설거지를 한 번 하고 나면 손목이 금방 욱신거리는데 눈앞에 쌓인 그릇들을 두고 돌아서기가 뭐해서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고 닦아버린다. 그렇게 해버리는 일들이 하나, 둘, 셋... 쌓여서 생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 바람에 아이의 마음 이야기가 그저 피곤하게 들린다.
그래서 요즘은 애써서 조금씩 쉬어보는 중이다. 싱크대 안에 쌓여있는 그릇들은 남편이 산책을 다녀와서 씻도록 놓아두고 나는 앉아서 좀 쉬었다가 아이들과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숨이 조금 깊이 쉬어지는 덕분에 아이들 이야기가 내 마음 언저리까지 전해져 공감의 말이 나오고 아이의 등도 한 번 더 쓸어주게 된다. 쉬자, 아프면 쉬자. 엄마도 쉬어야 한다. 엄마가 쉬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