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확진
ADHD인데 어쩌라고 라는 책을 쓰겠다고 다짐하고 며칠간 나는 글 작성조차 귀찮아서 안 쓰고 있었는데 자꾸 머릿속에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라는 생각으로 며칠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글을 작성하기 시작하면 답이 나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난 여전히 "생각"만 하고 글은 작성하지 않았을까?
책을 한 번도 써본 적 없고 정신과의사도 아닌 내가 할 말은 나의 인생으로 시작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어렸을 때부터 오늘 지금까지를 모조리 적고 ADHD 확진을 받은 사람이 읽었을 때 "공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내가 가장 잘하는 거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적어보려고 한다.
ADHD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을 나의 어린 시절은 사실 평범하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엄청 이상한 아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인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또래 친구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움직이는 곤충 아니면 동물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여전히 장난감보다는 곤충 또는 동물이랑 교감하는 게 더욱 좋다.
그러던 어느 날 방충망에 붙은 (방충망에 붙은 파리를 잡는 게 쉽다는 걸 터득하고) 엄청 큰 파리를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손으로 잡았고 파리가 숨 쉴 수 있고 내 손 안에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을 만들었다. 왜 그랬냐고 한다면 파리가 내손에서 움직이는 그 간지러운 촉감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일정시간이 지나면 방충망을 열고 파리한테 자유를 안겨주었다.
평소와 비슷한 어느 날에 잡은 엄청 큰 파리도 최소한의 공간과 숨 쉴 수 있는 구멍을 만들고 작은 내 주먹 안에서 움직일 수 있게 해 줬고 파리가 커서인지는 몰라도 더욱 간지러웠고 느낌자체가 달랐다. 작은 파리와 다른 촉감 때문에 평소보다 손 안에서 움직이게 하고 있었고 이제는 날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작은 주먹사이로 구더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너무 놀라서 손을 펴는 순간 내손에 구더기 몇십 마리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큰 파리는 이미 도망간 지 오래다. 구더기가 너무 징그러워서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고 이 시간 이후로 나는 벌레를 무서워하기 시작한다. 바퀴벌레고 곱등이고 모든 걸 만질 수 있던 애가 이 사건 하나로 벌레라는 모든 게 무서워지기 시작한 거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에 충격적인 첫 번째로 뇌에 선명하게 기억하고 나는 이걸 파리 구더기 사건이라고 사건명까지 만들어놨다. 뇌에 가장 강력한 내 인생 첫 번째 사건이 파리 구더기 사건이라는 부분에서 이 정도면 강력하잖아?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 이야기보따리 하나는 가지고 있다는 것 주제가 참신하고 누가 들어도 인상을 찡그릴 정도로 나쁘지 않으니 딱히 나쁜 기억이라고 하고 싶지 않다.
어릴 때 나는 음악을 좋아했던 아이였고 음악에 있어서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도 팝송을 듣고 오히려 사라들이 열광하고 있는 아이돌에는 관심이 딱히 없었던 것 같다. 여기서부터 나는 남들과 다른 취향이라고 생각했고 유일하게 좋아했던 가수는 유승준 정도였던 것 같다.
팝송을 듣고 춤을 추는 부분에서 행복을 느끼고 지금까지 내가 받은 인생 선물이 뭐냐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크리스마스인지 내 생일에 받은 SONY CD player라고 말하고 싶다. 얼마나 행복하던지 같은 노래를 반복하고 반복한 그날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당시에 DDR 다음버전으로 펌프라는 게 나왔는데 동내 오락실에서 나를 이기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음악과 박자에 맞춰서 발로 버튼을 누르는 천재적인 오락기계는 아직도 내 인생게임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상과는 다르게 피아노도 배웠으나 딱히 흥미가 없었고 선생님이 너무 강압적으로 말하고 혼내는 바람에 나는 피아노에 흥미를 잃은 것이 아니라 그 학원을 가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쯤 글을 쓰는 직업이 아닌 음악 쪽에서 활동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ADHD는 음악과 굉장히 가까울 수밖에 없고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도파민이 나오고 내가 과거에 수천번 들었던 노래를 우연하게 듣는 그날에는 엄청난 행복을 느낄 것이다. 다들 뭐 좋아하는 음악은 몇 시간이고 추천해 줄 수 있는 대단한 분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ADHD라면 발표시간을 극도로 피하고 싶었을 텐데 유일하게 중학교 음악수업에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자신 있게 불렀고 친구들이 박수 쳐줄 때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것으로 내가 알게 된 건 무언가 열심히 노력한 부분에서는 나조차도 자신이 있기 때문에 발표가 두렵지 않고 내가 노력하지 않은 부분을 남들에게 들키는 부분에 있어서는 극도로 피한다는 부분이다.
다른 건 모르겠고 나는 예술 쪽으로 남들보다 한수 위였다.
초등학교를 입학했고 학교를 가는 게 딱히 싫지는 않았다. 다만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내 기억은 언제나 똥이었다. 기분이 똥같이 나빴다는 게 아니라 학교에서 나는 똥을 싸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고 딱히 그건 부끄러운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왜 난 극도로 똥 싸는 걸 피했던 걸까?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다 가족전체가 식중독에 걸린 사건. 전날에 마트에서 아빠가 산 굴을 강제적으로 아빠 강요로 먹게 되었는데 다음날 학교에서 똥을 참았다가 바지에 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족 전체가 입원했고 다행인 건 부모님이 학교에 전화해 줘서 나는 바로 고모부랑 병원에 가게 되었다는 것.
똥을 지리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인간이라는 게 먹고 싸는 것이 당연한데 단 한 번밖에 없었을까? 똥을 참고 참다가 결국 못 참고 싸게 되었고 이걸 알게 된 담임선생님은 그때당시 30대 정도 되셨던 것 같은데 초등학교 2학년인 나를 식수대에 데려가서 닦아주셨다. 화장실로 데려가도 되는데 왜 식수대로 데려가서 씻겨주신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아직까지도 너무 고맙고 이것이 내 두뇌에 가장 강력한 내 인생 두 번째 사건이다.
ADHD 확진을 받으니 완벽하게 매치되는 한 가지는 "발표"였다. 초등학교 3학년 교생실습을 나온 선생님들이 오죽하면 내가 발표하면 남들보다 보너스를 두 배나 더 준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같은 반 친구들이 알려준 답으로 발표를 했지만 틀렸고 이후 나는 초등학교 6학년때까지 단 한 번도 발표를 하지 않았다.
중학교에 올라오고 새로 사귄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어있었다. 단 한 번도 리더를 하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말로는 설명 못하며 또래에 비해서 "심리"적으로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유치원 그리고 초등학교 때부터 남시선을 신경 쓰고 살아왔으니 이미 남들 시선을 얼마나 신경 쓰고 살아왔던가? 이미 나는 사람들이 1+1이라고 하면 2라고 답할걸 알고 있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사람들이 원하는 부분들 정확하게 캐치하고 그 부분을 이용해서 나는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리더가 되어있었다.
리더라는 게 뭐 거창한가? 아니다. 리더여서 좋은 점은 등교시간에 친구들이 내 집밑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간다던가 학교 끝나고 내가 청소당번이 있다한들 기다리는 뭐 그 정도였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나는 공부에는 애초부터 취미가 없던 학생이었다. ADHD 중에 고학력자가 간혹 보이긴 하지만 나는 정 반대의 학창 시절을 보냈고 당연히 성적은 뒤에서 순위를 다툴정도였다.
나도 "공부"라는 걸 해보기 위해 "독"서실을 유료로 다녔고 거기서 만난 학교친구들 전부가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학생인데도 불구하고 염색하고 오토바이를 타는 나쁜 오빠를 만나는 친구들이 있었고 오토바이를 타는 그 형이라는 사람은 담배를 집에 가져가면 부모님한테 걸린다며 나에게 담배를 맡기고 집에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당연히 나는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그 담배를 나눠 피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말하는 겉담배를 피우던 와중 조금 논다는 친구 한 명이 우리를 향해서 말했다. "야 쟤네 겉담배 피워!"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나서 물어봤다. "이렇게 피는 거 아니야?" 그러자 그 친구는 "담배연기를 깊숙하게 삼키라고 말했다" 그 이후는 뭐 말 안 해도 알듯 나는 니코틴 중독에 걸렸고 담배를 끊을 수 없었다.
나쁜 길로 빠지기 전 부모님이 이걸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갑자기 유학을 가게 된다.
유학얘기를 다 작성하고 보니 학교얘기 중 가장 하고 싶은 스토리가 있다. 이 책은 ADHD들이 많이 읽을 거라는 생각으로 질문을 해보자면 "여러분은 혼날 때 안 웃으셨나요?" 선생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있는 데고 나도 전혀 웃긴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허벅지를 꼬집은 적도 여러 번이고 나 스스로 허벅지 피멍을 만들었고 그렇게 꼬집었는데도 참지 못해 터져 나오는 웃음 때문에 더 혼난 적이 많다. 이때 내가 ADHD 인걸 발견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웃음을 못 참는 걸 말하고 나니 또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학교 다닐 때 발표시간에 정말 죽을 맛이었다. 남들이 나한테 시선을 집중한다는 부분과 내가 틀리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으로 정말 식은땀이 난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중학교를 잘 다니고 있던 와중 아버지의 사업이 잘되었고 누나와 나는 "싱가포르"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이유는 중국말과 영어를 동시에 배울 수 있는 곳이었고 지금 말로는 "블루오션" 같은 곳이었다. 위에 작성한 것처럼 긴말필요 없이 한국에서도 공부를 안 했던 아이가 과연 공부를 했을까?
제주도보다 작은 싱가포르이라는 곳에서 한국으로 따지자면 강남에 위치한 학교에 다녔으며 그 작은 땅덩어리에 럭비장까지 있는 대단한 학교에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공부는 하지 않았다. 아니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유학을 온 학생은 두 부류이다. 공부를 잘해서 유학을 온 학생들과 한국에서 사고를 친 학생들 딱 두 부류로 나눠졌으며 당연히 나는 한국에서 사고 친 무리 속에서 한국보다 "더" 재밌게 놀았고 한국에서 학생이 할 수 없고 오직 성인만 할 수 있는 행동들도 "돈"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당시에 대기업에서 지원받고 온 학생을 무시할 정도로 개인사업을 하는 학생들은 "돈"이라는 게 많았으며 친구들 모두 신용카드라는 걸 중학교 2학년 때 쓸 수 있었다. 글을 쓰다 보니 생각난 스토리 중 하나는 굉장히 고급스러운 술집에서 가격표를 안 보고 시켰고 결국 신용카드 한도초과로 "가디언(보호자)"를 불러서 결제를 했고 당시 술값 400만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이 나왔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동남아인 (가디언 Guardian) 이 술집에 계산을 하러 왔고 무리 중 가장 잘 사는 친구가 전화 한 통을 하니 아무 말 없이 카드결제를 하고 나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 중학생 시절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미 X 놈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제주도 보다 작은 나라에 럭비장까지 있는 학교는 학비가 매우 매우 비싼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이가 없지만 나는 퇴학을 당했다. 천 단위에 학비 그리고 보증금을 포함하면 고급 승용차 한 대를 나의 실수로 날려버렸다.
이유는 입학실날 화장실에서 담배를 학교를 같이 다니는 한국인 형이랑 폈기 때문이다. 한국 학교는 모르겠지만 캐나다 국제학교 교장은 캐나다 인이었고 같이 담배를 핀 한국형은 고등학생이어서 봐준다고 했으나 나는 담배필 나이도 아니고 반성의 기미가 없다고 퇴학을 당했다. 벤츠 S클래스를 구매할 학비를 담배 한 개비로 날려버렸고 보호자와 엄마가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고 교장 그리고 교감 몇 명의 선생님들과 대화를 했고 엄마는 울었다.
엄마가 울면서 봐달라고 했지만 달라지는 건 전혀 없었다. 살면서 엄마가 서글프게 우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난다. 돈을 떠나서 필터링 없이 나의 단점과 이 학교를 다니면 안 되는 이유를 너무 명확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나는 "비정상적인 아이" 였다고 말하고 싶다.
성인이 되고 나서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나는 학교에 도움이 안 되는 학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퇴학이 당연하지만 그때당시에는 속으로 욕만 하던 반항아였다. 불효 끝판왕이라고 생각하는 이 사건은 아직도 마음 아픈 내 세 번째 사건이다.
이후 지금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사업이 유쾌하게 흘러가지 않았지만 "돈"만 주면 입학을 시켜주는 아주 비싼 학교에 입학을 했고 나는 졸업을 했다. 물론 한국처럼 등교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졸업증을 주는 그런 비정상적인 학교였지만 아직도 그 학교는 명문학교로 불리고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연히 싱가포르 고등학교로 갈 줄 알았지만 아빠는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업이 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 학교를 다니려면 나는 1년을 꿇어야 했고 당연히 그러려고 했지만 아빠는 나에게 통역을 부탁하며 중국으로 데려갔다.
강아지 알레르기가 있던 아빠가 웬일인지 강아지를 분양하러 가자고 했다. (이때 알았어야 했는데) 강아지를 분양했고 친구 한 명 없던 중국 심천에서 나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다녔고 그 강아지는 2주를 못 버티고 하늘로 떠났다. 아픈 강아지를 판매한 그 애견샵이 원망스러운 것보다 나는 빠르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론은 중국 고등학교 입학이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당연히 공부를 안 했고 오히려 싱가포르보다 물가가 저렴해서인지 새벽 2시까지 양꼬치와 칭다오 맥주를 즐겼으며 나이제한 입장제한도 없는 그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처음으로 클럽이라는 곳까지 경험하게 된다.
마치 어른들이 하는 행동처럼 클럽이 끝나면 1층에 있는 말도 안 되는 크기에 사우나를 갔으며 친구 갔던 엄마에 잔소리는 나에게 너무 가벼웠다. 결론적으로 나는 고등학교조차도 "돈"으로 자격증을 받았다. 수학을 좋아했던 나는 나이 35살을 먹고 이제야 중학교 수학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유학을 다녀왔다고 하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이며 학창 시절 놀기만 했던 부분을 나는 후회한다고 말하고 싶다. 다만 어린 나이에 완벽하게 놀아서 인지 성인이 되고 나서 또래들이 하고 싶다는 모든 것들에 관심이 없었고 어린 나이에 세상 돌아가는 부분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 공부를 제외한 모든 것들에서는 보는 눈높이 자체가 달랐다.
당연히 성인이 되면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때당시 여자친구와 피시방에서 나는 군입대 지원을 해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냥 인터넷 지원을 했고 입대일은 정확히 7일 후였다. 그때당시 나에게 군대라는 건 그냥 놀러 간다고 생각했고 여자친구는 어이없어했다.
고민 없이 군입대를 했고 나는 군입대 10분 만에 후회를 하며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게 가능할까? 절대 불가능했고 그대로 나는 1년 10개월이라는 시간을 군대에 있었다. 운전병이 재밌겠지 라는 생각으로 운전병을 지원했으나 남들과 다르게 신병교육대를 지나 야수교라는 곳에서 운전교육을 몇 주간 받고 나서야 나는 생활관을 가게 되었다.
다만 이상할 정도로 ADHD 라면 군대에서 생활은 오히려 정신적 스트레스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피곤해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밥 먹을 시간과 작업시간이 명확하게 흘러가는 그 군생활에 정신적 스트레스는 오히려 없으며 육체적으로만 힘들었다.
내가 누구인가? 어린 나이에 인생을 알았다고 생각했고 내가 유일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어리다"였다. 선임이며 후임이며 딱 봐도 정신적으로 어린 부분이 보였다. 자대 배치 후 PX라는 꿀보직이 편한 것 같아서 정품인지도 모를 당시 발리지갑을 PX를 운영하던 병장한테 주며 나는 말했다. "제가 물려받고 싶습니다" 당연스럽게 나는 PX를 물려받았고 그때 당시 인터넷을 하려면 싸지방을 갔지만 나는 PX 컴퓨터로 인터넷과 내 직통 전화기로 여자친구와 아침마다 전화를 했다.
그리고 상병 3호봉이 된 후 남들 다 5시에 일과종료인데 나만 7시에 종료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자 나는 후임에게 PX를 물려주고 다시 운전병으로 복귀해서 매일 운행을 나가고 사회공기를 맡았다. 글로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스토리는 우리 대대에서 전설로 남아있으며 몇몇 사람들은 나한테 미친 여우 x끼 라며 욕했지만 그럴 때마다 내 마음속에 나오는 답은 "어쩌라고"였다.
겉으로 보기엔 남들과 다른 점이 전혀 없지만 우린 ADHD다.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ADHD 확진이면 상근이나 군입대가 힘들다는 걸 봤다. 어느 정도 공감하는 게 인간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며 누군가 시답잖은 소리를 하면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어른이 되고 느낀 점은 "사람은 다 알아"라고 말하고 싶다. 누가 나한테 인상을 찡그리면 상대방은 모를 수가 없다는 것. 그때 당시는 몰랐고 당연히 상대방은 나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
인생을 살면서 통제를 받은 적도 없으며 누군가에 말을 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군대라는 곳은 상 하 관계과 확실한 곳이며 하기 싫어도 해야 하고 선임의 말에 복종을 해야 하는데 분대장이 나에게 화를 내며 말하는데 무시를 하고 말대꾸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또x이가 아닐까 생각하지만 그때당시에는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했다. 결론은 그 선임이 전역할 때까지 내 군생활은 지옥이었다.
무사히 전역을 했고 나는 느끼는 점이 너무 많다. 군대에서 인생을 배웠고 엄청난 교훈을 얻었다. 다시는 군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내 인생에서 군대는 지금에 나를 있게 한 엄청난 곳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내가 군대를 안 갔으면 아마 나는 이 세상에 없거나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군대를 전역했다. 대학교도 안 나온 내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당연히 없다. 군대를 기다려준 여자친구를 뒤로하고 나는 호주 케언즈라는 곳에 워킹홀리데이를 가게 된다. ADHD가 여기선 굉장히 유리하다. 극한을 만나면 오히려 남들보다 더 노력한다.
공항에서 엄마가 챙겨준 김치는 물론이고 면세점에서 구매한 담배 2보루를 그대로 뺏기며 그때당시 벌금으로 몇십만 원을 내고 나니 내가 가져온 100만 원 중 50만 원 미만이 남았다. 방세는 미리 납부하고 왔지만 그것마저 2주 치.
똑똑하다고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50만 원이 언제 떨어질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생각보다 취직은 물론이고 날씨가 너무 더웠다. 유일한 운송수단인 자전거를 10만 원에 구매했지만 날씨가 너무 더워서 인지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타이어가 녹았다. 내가 호주를 다시 간다면 자전거 펑크수리를 부업으로 무조건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들정도로 이틀에 한번 펑크가 났다.
그런 자전거를 타고 수십 곳에 카지노와 호텔에 이력서를 돌렸지만 전화 한 통도 안 왔다. 엄마한테 돈을 달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진짜 우리가 알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보다 그때당시 불쌍하게 살았다. 피시앤칩스에 있는 감자튀김을 봉투에 싸와서 며칠을 먹었으며 2천 원짜리 식빵으로 일주일을 버티면서 이력서를 뿌렸다.
평소와 똑같이 이력서를 돌리고 있었고 당연히 취직이 불가능하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표조차 구매할 비용도 없었고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밥 한 끼 먹지 않고 저녁 8시까지 이력서를 돌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국처럼 가로등이 있는 게 아닌 해가 없으면 정말 암흑밖에 없었으며 심지어 내가 살던 동내는 호주 원주민(Aborigine)이 많았던 동내였다.
사진상으로는 그나마 멋있어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정말 무섭다. 자전거를 타고 무서워서 엄청 빠르게 가고 있는데 멀리서 시속 100은 넘기는 흰색 차량한 대가 멈출 생각을 안 하고 그대로 직진하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멈추겠지 라는 생각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는데 그대로 차가 나를 치고 갔다.
이게 무슨 운인지는 모르지만 공중으로 붕 뜬 나는 미세한 상처 조금밖에 없었지만 충격은 엄청났다. 살면서 자전을 타고 가다가 차랑 사고가 나다니? 운전자는 백인이었고 커플이었다. 차를 세우고 나한테 괜찮아? 하지만 우리는 도와줄 수 없어 그냥 갈게 우리 꼭 용서해줘 라는 말을 남기고 그냥 도망쳤다.
정말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진다. 호주 원주민 10명이 나를 둘러싸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를 하는데 다행히도 나를 걱정하는 느낌이 들었고 그냥 누워있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게 내 두뇌에 가장 강력한 내 인생 네 번째 사건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위치에서 사고가 났는데 카니발 같은 차량이 내 앞에 멈췄다. "hello are you okay?" 정말 오랜만에 보는 동양인이었는데 믿거나 말거나 그 사람은 호주에서 태어난 한국여자와 엄마였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구급차에 신고해 줬고 국제변호사까지 선임해 줬다. 잘 알지도 못하지만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하나로 그 한국 모녀는 밤새 병원에서 나를 기다려줬고 도움을 줬다.
호주가 선진국인 이유는 돈 1원도 받지 않고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1인실 병실에서 치료를 받게 해 줬고 원할 때까지 입원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일어나자마자 퇴원시켜 달라고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1인실 그 병원은 호텔급이었다.
그 한국인 모녀는 유일하게 케언즈 그 시골마을에 한국마트를 하는 모녀였는데 퇴원을 하고 너무 고마워서 그때당시 G마켓만 해외배송이 가능했고 한국말을 어눌하게 하는 그 여자아이한테 원하는 게 있냐고 묻자 한국옷을 구매하고 싶다고 해서 여자옷을 구매해 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서 식품을 구매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다만 돈이 떨어지고 일자리가 구해지지 않자 보웬이라는 "더" 시골마을로 같이 사는 한국사람들과 움직였고 정말 어마어마한 토마토 농장으로 들어가게 되어 더 이상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못했다. 토마토 농장에 대한 얘기를 자세히 작성하고 싶지만 정말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으며 군대에서 힘든 육체노동은 그냥 장난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5초에 한 번씩 내려오는 토마토 박스를 차곡차곡 쌓는 일인데 박스는 10kg였고 하루에 천 개 이상 움직이다 보니 퇴근하고 나면 손을 펼 수도 없을 정도였다. 군대에서 해본 적도 없는 찜질이라는 걸 했고 할 수밖에 없었다. "돈 버는 게 이렇게 힘든 거구나"라는 생각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줬던 토마토 농장.
인터넷도 너무 시골이라 터지지 않았고 멜론 한곡 들으려면 적어도 5분을 기다렸지만 그렇게 기다린 음악이 얼마나 꿀이던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노래는 지금 들어도 토마토농장을 생각하게 하며 지금까지도 좋다. 합숙소에 살았는데 유일하게 일이 끝나고 조깅을 하면서 이 노래를 들을 때면 행복도 이런 행복이 없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인터넷도 잘 안 터지는 그 시골동내에서 유일하게 대형마트 울월스에 갈 때 공용 와이파이를 사용했고 그때만 유일하게 인터넷을 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내 맞선임이 호주 퍼스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고 바로 오라고 하길래 토마토 농장에서 친해진 형이랑 같이 호주 퍼스로 가게 된다.
퍼스로 가기 위해 토마토 농장을 그만두고 공항 인터넷이 될 때 국제 변호사한테 연락을 받았다. 진료기록만 완벽하게 1년 동안 정리하면 1억이라는 보상금을 호주국가에서 받게 될 거라는 소리였다. 호주간지 두 달도 안돼서 나는 1억이라는 돈을 번 것이다. 지금생각해도 아찔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했음에도 몸이 아픈 곳이 없었는데 선진국은 선진국인지 1억이 가능하다는 전화를 받고 번돈은 재밌게 쓰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교통사고는 몇 년 뒤에 통증이 온다고 했던가? 허리가 이제야 아프기 시작한다)
맞선임을 만났고 운이 너무 좋게도 그 동내에서 가장 좋은 호텔에 취직해서 주급으로 백만 원을 넘게 벌었고 지금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들이 내 인생에 첫 번째 찾아온 행운이었고 호주 생활만큼 열심히 살았던 적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글을 보고 있는 사회초년생 또는 청년이 아니라고 한들 호주라는 나라는 꼭 가보는걸 나는 추천한다. 해외 이곳저곳 다 다녀봤지만 진짜 레전드라는 단어가 안 나올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인생 처음으로 여기서 살면 너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동남아 같은 나라는 평생 살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지만 호주는 정말 영주권만 가능하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너무 자유로웠다.
군대를 기다려주고 호주 1년까지 기다린 여자친구가 아니었으면 아마 나는 평생 그대로 호주에 살았을 거다. 군대를 기다려준 여자친구보다 나는 호주가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전역 후 몇 달 후에 호주로 날아갔지만 호주까지 기다려준 여자친구 때문에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워킹홀리데이가 기본 2년이라면 말이 다르겠지만 1년을 추가하려면 농장이나 육가공공장에서 6개월을 일해야 1년이 추가로 연장되었기 때문에도 나는 호주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복귀하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여자친구는 군대와 호주를 기다려줬다며 만날 때마다 생색을 내기 시작했으며 언제나 삐져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거의 8년을 만난 여자친구와 관계정리를 하고 나는 호주에서 벌어온 돈으로 신나게 놀았다. 여자친구랑 헤어진 지 단 일주일 만에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다. 중학교 때부터 여자친구가 있었고 여자친구가 없으면 나는 안 되는 사람이구나 나는걸 알게 되고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으며 그 여자친구와도 5년이라는 긴 시간의 연애를 했다. 이것으로 내가 알게 된 사실은 두 개였다.
여자친구가 꼭 있어야 하는 애
만나면 남들보다 굉장히 오래 만나는 애
상대방이 아니라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남들보다 오래 만날 수 있는 이유는 친구도 별로 없고 과도한 집착 그리고 상대방을 귀찮게 하거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도 남들처럼 짧게 만나고 헤어지고 많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만 ADHD 특성상 이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다른지 모르겠다)
한국에 돌아오고 대학교를 가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으며 지금도 그 생각은 동일하다. 다만 대학교를 유일하게 가고 싶은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하자면 동아리 활동이나 MT 같은 놀생각 밖에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안 가길 잘한 것 같고 좋은 대학교를 못 간다면 돈낭비라고 생각했다.
대학교를 안 나온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육체적인 노력을 제외하고 무언가 얻기 위해서 노력이라는 걸 단 한 번도 안 해본 내가 과연 이력서를 노력해서 작성했을까? 당연히 대충대충 작성한 다음 잡코리아에 올려놨고 심지어 내가 지원하는 게 아닌 회사에서 나한테 전화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서 전화가 왔겠는가? 짐작했겠지만 보험회사 그리고 수많은 영업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당연히 검색이라는 것도 대충대충 하고 그냥 어설픈 정장을 입고 서울역 한화생명이라는 곳에 면접을 보러 갔다. 전화 온 팀장이라는 사람이 어찌나 재밌게 말을 하던지 다른 회사와 전혀 다르게 면접 한번 보고 싶다고 했고 ADHD 유일한 약점인 내 칭찬을 엄청하기 시작하니 면접 한 번은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보험회사 학력이 필요 없고 유일하게 실력으로 돈을 버는 곳. 매력 있지 않나? 문턱이 높고 월급보장이 아닌 문턱이 낮지만 실력이 좋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곳. 지금 나이에 생각하면 절대로 보험회사 면접은 전화에서부터 거절하겠지만 해외에서 살아온 내가 보험회사가 뭐 하는 곳인지 전혀 몰랐고 한화라는 나름 대기업 네임벨류에 넘어가서 4주라는 교육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지겹고 아찔하다)
4주 교육이 끝날 무렵 동기들한테 고맙다고 발표를 시켰는데 얼마나 긴장을 한 건지 처음으로 공황장애가 왔고 (그때당시 불치병에 걸린 줄) 나는 집에 가는 길에 동내 병원에 들러서 심장이 2초 동안 멈췄다고 의사한테 말하니 신체적으로 전혀 문제없다고 귀가조치 당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공황장애였고 당시 정말 숨도 못 쉴 정도로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교육이 끝났고 혼나기만 했던 초중고 선생님을 상대로 연금보험을 팔기로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부분에 집중했고 (누가 알려준 적 없음) 그 포인트만 정리한 다음 보험을 팔았다. 인생 처음으로 내가 사람한테 말하는 스킬이 좋다는 걸 처음 알려준 곳이 보험회사인데 그 이유는 내가 입사한 지 두 달 만에 지점 1위를 찍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나한테 전화 온 팀장보다 말을 더 잘해서 리쿠르팅(채용)까지 지점 1위를 찍었고 그때당시 천만 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ADHD 여서 그런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나는 배가 부르면 절대 안 되는 사람인게 일을 안 해도 그동안 계약한 것들에서 돈이 들어오니 보험회사 특성상 고객을 만나러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출근조차 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그만둔 가장 큰 이유는 또 "발표"였다. 지점 1위를 하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팔았고 비결이 뭔지를 말하는 30분 때문에 그만뒀다. 지점 1위는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지만 일부러 계약을 다음 달로 넘겨서 했고 오히려 1위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는데 가입한 고객이 추가계약과 지인까지 가입을 한다고 해서 나는 지점 1위가 되었고 정말 그 발표가 싫어서 전화로 퇴사통보를 했다.
보험회사를 그만뒀는데 마침 호주 국제변호사가 입금이 될 거라고 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돈이 떨어질만하면 자꾸만 나한테 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1억에서 세금을 제외한 8천만 원이 신한은행에 들어왔는데 정말 지금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나는 그 돈을 4개월 만에 다 써버렸다.
쉽게 들어온 돈은 쉽게 나간다고 비싼 음식점에서 한 개만 시키면 될 것을 두 개 세 개를 시켰으며 정말 돈 관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안 했고 그냥 모조리 써냈다. 4개월 이후 통장에 단돈 130만 원이 남았고 나는 직장도 돈도 없는 그냥 백수에 밑바닥 인생을 시작한다.
돈이 없었으니 전세금을 빼서 생활비로 사용하고 내 인생 처음으로 고시원이라는 곳을 들어간다. 월 15만 원 정말 저렴한 금액인데 그 크기는 싱글침대라고 하기에도 미안할 정도로 작은 침대에서 문하나 열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고 쓰레기장이 따로 없었다.
밥과 김치는 제공이 되는데 같이 생활하는 일용직 사람들이랑 같이 먹는다는 부분과 위생개념이 너무 부족해서 밥솥을 열어보면 고춧가루 뭍은 숟가락으로 밥을 덜어냈는지 먹지 못할 정도였다. 신기하게 고시원에 살면서도 밖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그 시절 운이 좋게도 비트코인이라는 것이 미친 듯이 오를 시기 2016년이었는데 코딱지 같은 돈으로 밥을 사 먹을 수 있으며 심지어 고시원생활 두 달 만에 나는 비트코인으로 전세 7000만 원짜리 집을 구 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비트코인 상승시기가 나한테 기가 막히게 매치가 된다.
고생 끝 행복시작이라는 문장이 계속 머릿속에 떠다닐 정도로 전셋집을 구하고도 나는 비트코인으로 돈을 잘 벌었다. "사람들은 일을 왜 하는 걸까?"라는 가벼운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살았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처럼 비트코인 상승은 얼마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한다.
사람들은 일을 왜 하는 걸까?라는 질문에 하늘이 답해줬다. 까불지 마라 꼬맹아 노력 없는 인생은 나락이다. 비트코인이 한없이 올라갔다면 오히려 그 인생자체가 지옥이 아니었을까? 나에게 교훈을 줬고 인생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이 부분에 있어서 조금만 진중하게 생각하면 좋았을걸 나는 또 1차원적인 생각으로 "나 동물 좋아하잖아"라고 생각했고 에버랜드 사육사에 지원하게 된다. 동물학과를 나온 것도 아니고 정말 내가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비트코인이 나락 가고 이력서는 정말 노력해서 작성해 봐야겠다고 생각했고 내 이력서를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글을 작성했다.
기대를 안 했다면 거짓말이고 사실 확률은 50% 정도 보고 있었다. 1차 서류통과 되었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이때 아마도 내 인생 최초로 "노력" 이 부분에 대해서 이해하고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구나? 면접준비도 인터넷을 찾아가며 노력을 했고 영어 중국어까지 전부 준비해 갔다. 결과는 뭐 말 안 해도 합격이었다.
한화생명 보다 더한 교육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사육사가 된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게 그 발표시간도 버틸 수 있었다. 심지어 나이대가 비슷해서 교육이 더더욱 재미있었다. 교육 마지막날 서류를 지원하고 교육하면 100% 합격인 줄 알았던 사육사는 수많은 사람들 중 단 3명이 사파리차를 타고 동물원으로 올라갔다.
동물농장에서 봤던 동물원에서 가장 높은 사람과 대화를 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최종면접이었고 3명 중 단 한 명이 합격했다. 나머지 두 명은 어이없게 교육까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청소알바를 하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최종선택 1인은 내가 되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사육사 옷을 지급해 줬는데 세탁소 형식으로 하루 입고 명찰만 변경해서 세탁한 옷을 입는 아주 기분 좋은 시스템이었다. 몽키벨리라는 원숭이 파트로 가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뒷문으로 들어가니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막을 정도로 지독했다.
그것까지도 나는 참을만했고 금세 적응했다. 동물들 과일을 세척하는 일도 즐거웠고 침팬지를 유리창 없이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사람들이 들어가고 싶은 그 동물원을 한 달 만에 그만뒀다.
사람들한테 그만둔 이유를 말할 때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생각보다 내가 동물을 좋아하지 않더라고"라고 말하지만 그만둔 이유는 따로 있다. 입사 3주 후 나한테 외울 것을 주더니 외워오라고 했다. 이것까지 괜찮았는데 문제는 동물원에 놀러 온 고객들한테 마이크를 끼고 설명을 해야 하는데 에버랜드에 가본사람은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닌 율동까지 하면서 원숭이를 소개하라기에 부담감이 밀려와서 퇴사통보 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퇴사를 해버리고 만다.
단 한 번만 극복하면 되는 일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부담감과 이상한 자존심 때문에 그만두게 되었다.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또다시 그만둘 것 같다는 생각밖에 없다. 동물을 많이 좋아하지만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게 극도로 싫었던 것이다.
사육사를 그만두고 국비지원으로 용접이라는 걸 배웠다. 생각보다 손기술이 굉장히 디테일한 직업이었다. 손으로 하는 건 자신 있었기에 나는 같이 교육받고 있는 사람보다 실력이 좋았다. 교육을 받으면 매달 돈도 준다고 하길래 배웠는데 이 마저도 기간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그만둔다. 나는 다 배웠다고 생각했고 의미 없는 시간 쓰지 말고 바로 취업을 하고 싶어서였다.
운 좋게 용접공으로 취업이 되었는데 용접보다 보조역할을 했고 필터링 없는 아저씨들의 욕설과 큰소리는 정신적으로 참기 힘들었다. 하루에 17만 원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했다. "170만 원을 준다 해도 더 이상은 못하겠네"
계속해서 일을 오래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자신감을 잃었고 인생 처음으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무서움과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은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잠겨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배달로 음식을 자주 시켜 먹으니 처음으로 100킬로 가까이 살이 찌게 된다.
ADHD 특성인지는 모르겠다만 돈 벌생각은 하지 않고 돈이 떨어지는 시기를 기가 막히게 계산하고 아끼고 또 아끼기 시작한다. 일은 안 하고 대출 돌려 막기 신용카드를 사용하니 불어나는 건 살뿐만이 아니었고 감당할 수 없는 빚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이때부터였다. 더 이상 대출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극한으로 내몰리면 그때서야 움직이는 게 ADHD 아니던가? 누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내 인생이 바뀌려면 살부터 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터넷 자료를 다 검색했고 나는 똑똑하게 살을 감량했다. 100킬로에서 67킬로 까지 단 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살이 빠지니 몸이 작아 보여 근력운동을 시작했고 "노력"이라는 부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에 1만 보는 기본이었다. 사람은 하다 보면 실력이 늘어난다. 하루 1만 보가 힘들었는데 어느 순간 4만보까지 걷기 시작했고 걸을 때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라는 생각만 하면서 걸었다. 근력운동도 남들이 보기에 미쳤다고 할 정도로 했다. 나에게 루틴이고 세트고 그런 단어조차가 없었다. 푸시업을 할 때는 하지 못할 때까지 하는 게 유일한 답이었고 하루 10개도 힘들었던 내가 한 번에 300개를 하게 된다.
살을 빼면서 느낀 점이 너무 많다. 먹고 싶은걸 참고 또 참았다 결론적으로 신기한 건 다음날 일어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편했다. 무거웠던 몸이 정말 가벼워졌으며 어떤 옷가게를 가서 옷을 입어봐도 기분 좋게 맞아떨어졌다.
살을 감량하고 인바디라는 커뮤니티에 글을 작성했다. 이유는 단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저 대단하죠?라고 물어보고 칭찬받고 싶었고 두 번째는 내가 느낀 점과 이렇게 하면 쉽습니다. 나는걸 말해주고 싶었다. 글을 작성해 본 적도 없는 애가 신들린 것 마냥 글을 작성했는데 시간이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져들어 글을 쓰고 있었다. 글이라는 건 내가 재밌어야 남도 재밌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으로 쓰는 글인데도 베스트글이 되었다. 사람들이 달아주는 댓글에 힘이 나고 재밌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글을 작성하고 평소와 똑같이 만보를 걷던 중 내가 나한테 답을 알려줬다.
"너 글로 돈 벌어야 해"
체중을 감량하면 사람이라는 동물은 자기 관리를 더 하게 된다. 염색부터 시작해서 패션까지 여러 가지를 신경 쓰기 시작한다. 먹는 음식까지 건강한 음식으로 바뀌며 자연스럽게 잦은 운동으로 정신까지 맑아지기 시작하며 우울증이라는 건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보람차다고 해야 할까? 심지어 침대에 누워서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몸이 피곤해서 일찍 자고 일찍 눈을 뜬다.
몸은 완성인데 정신이 완성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왜 갑자기 들었을까? 정신병원을 검색하고 나는 무작정 찾아간다. 누가 알려준 적도 없는데 아직까지도 왜 병원에 가게 되었는지 아직까지도 모르겠다만 병원에 도착하니 대기를 하라고 했다. 10분 20분을 기다려도 부르지 않았고 50분이 지났는데도 부르지 않았다. 오기가 생겨서 오히려 참고 또 참아서 결국 진료를 받았다.
"왜 오셨어요?"
"모르겠어요 문제 있는지 검사 같은 거 해볼 수 있나요?"
"허허 검사종류가 많은데요"
"정상인 것 같지 않아서 선생님이 저를 보시고 추천해 주시면 검사 좀 해보고 싶습니다"
"ADHD 검사 한번 해보실래요?"
"그게 뭔데요?"
이상할 정도로 왜 나는 처음 듣는 그 ADHD라는 단어가 예전부터 알고 있는 단어로 다가오는 걸까? 검사는 상당히 집요했고 전문적이었다. 검사를 끝내고 상담을 했는데 의사가 한 첫마디가 이거였다.
"군대 다녀오셨어요? 힘드셨겠어요"
"네 왜요?"
"ADHD이고 남들보다 조금 더 심하세요"
"약 먹어야 하나요?"
"네"
기분이 왜 좋을까? 정신병이 있으면 기분이 안 좋아야 하는데 왜 나는 오히려 좋았을까? 나름 운동도 하고 만족하는 인생인데 약을 먹으면 더 대단해진다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약을 타왔고 그 약은 메디키넷이라는 약이었다. 5년 전 내 나이 30살 아직까지도 처음 약 먹은 그날의 기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여자친구한테 잦은 짜증을 냈는데 약만 먹으면 짜증을 안 냈다 추가로 처음 약 먹은 그날에 정말 신세계가 보였다.
물론 지금은 약을 먹어도 그날에 기분은 절대 느낄 수 없지만 처음 약을 먹었을 때 정말 천재가 된 것처럼 ADHD 글을 디시인사이드라는 갤러리에 작성했고 나는 여전히 ADHD에서 추천수 1위에 베스트글을 작성하게 된다. 사실 글을 작성할 때는 약 없이도 몇 시간이고 작성할 수 있지만 ADHD에서 가장 큰 단점으로 보이는 건 책상에 앉기까지 시간이 굉장히 소요된다는 점이다. 약만 먹으면 책상 앞에 앉을 수 있고 글을 작성하면 몇 시간이고 작성하는 건 나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그렇게 노력해서 작성한 첫 글이 홈런을 치게 된다.
*지금 까지 작성한글을 처음부터 읽어보고 수정도 해야하는데 여전히 나는 글 수정이 귀찮아서 수정은 하지않고 있다. 심지어 약을 먹었는데도 이 고질적인 부분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저녁 11시 작성을 시작으로 새벽 3시까지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글을 작성했다. 고집이 있어서 누가 뭐래도 나는 이걸 책으로 낼생각이고 나는 이 책이 잘 팔릴거라는걸 너무 잘알고있다. 이 기분을 노래로 표현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이 노래밖에 생각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