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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종달이 Nov 25. 2022

아몬드 후레이크가 단연 1등입니다.

첫 번째 병원의 불쾌한 상담을 교훈으로 아들과 나는 '병원 투어'를 시작했다. 대학병원, 종합병원부터 유명한 클리닉, 센터 투어는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매 번 똑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상담은 정말 끔찍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언제부터 음식을 거부했다고요?"


"..... 그게요. 작년, 아니 중 1 끝날 때 다이어트가 극도로 달했고요.."

매번 병원에서 같은 말을 하니, 질문에 대한 답을 녹음하고 다니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힘들어 가면서, 시간과 돈도 아낌없이 써 가면서 정말 맘에 드는 병원을 발견했다.

대한민국에서 이 분야에서 '제일 오래되었고, 가장 전문적인, 그리고 나름 상담도 친절한' 병원을 선택함을 나는 칭찬했다.


"아들, 이 병원이 얼마나 좋은 곳인 줄 알아? 우리 이제 낫기만 하면 돼."


아들의 상태가 곧 나을 거란 '희망'에 부풀어서 의사 선생님과의 정밀 상담을 하고 진료를 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아들의 병은 '거식증-섭식장애'이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조금 웃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어머님, 거식증, 즉 섭식장애는요, 다이어트에서  시작은 됐지만, 그게 원인이 아니에요."


"네? 그럼 뭐가 원인인가요? 과도한 다이어트에 집착했으니, 그걸 안 하면 되지 않아요?"


"네, 보통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생각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시간이 걸려요."


믿고 열심히 진료를 다니기로 한 병원인데, 이런 말을 듣다니, 믿기 어려웠다.


거식증은 내 안에 있는 수치심, 분노, 강박관념과 완벽주의에서 오는 거예요.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것이 '음식' 이라서요.
그걸 통해서 간신히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죠.
아드님은 지금 굉장히 우울하고 힘든 상태예요.
자존감이 바닥입니다.


아들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했다. 보통의 중학생 남자아이가 하루 700kcal를 지켜 가면서 매일 3시간의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음식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꾹 참고, 절대적으로 탄수화물, 군것질을 입에도 안 대는 것. 어떤 일이 있어도 새벽에 일어나서 사이클을 1시간, 홈트레이닝을 1시간 30분, 조깅을 1시간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의 의지 이상이라고 했다. (그럼 칭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독함과 완벽주의'로 인해서 아들의 뇌는 참고 참고 또 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극단적 단식'을 선택한 것이다. 아들의 섭식장애를 해결하기 위해서 의사는 우선 하루 5끼를 먹으라고 했다. 아울러 정기적인 상담, 진료와 함께 약물 치료도 시작되었다.



'새벽-아침-점심-저녁-자기 전' 이렇게 조금씩 나눠 먹는다.

반드시 반찬, 밥, 국이 있는 한정식 위주로 먹는다.

중간중간에 간식을 먹는다.

너무 군것질을 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

음식에 대한 집착이 심해져 폭식을 해도 괜찮다. 다시 규칙적으로 시작하면 된다.

매일 음식을 먹고 음식일기를 쓴다. 음식을 먹을 때, 감정을 솔직하게 쓴다.

굶는 것을 절대적으로 지양한다.

물을 수시로 많이 먹는다.

공복이 참기 힘들면 사탕이나 껌을 씹는다. 혹은 레몬즙, 식초를 마신다.



"엄마, 미쳤어요? 내가 2년 동안 얼마나 힘들게 이 식스팩을 만든 건데요. 벌써 조금 먹었다고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고요!!"


"아냐, 네가 살이 어디 있어?" (식스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가죽이 등에 붙은 지경이었다.)


"아들, 조금씩 먹으면서 여기에 네 감정을 써봐. 어때?"


"어떠냐고요? 미치겠어요. 죽고 싶고, 음식 앞에 무너지는 나 자신이 끔찍해요. 혐오스럽다고요."


..........................


아들은 음식을 먹는 순간, 자기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음식 일기장에는 온갖 부정적인 단어가 가득했다.

쓰다가 성질이 나면, 북북 찢어버리기도 했다. 배고픔을 참고 또 단식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음식을 먹고, 후회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유난히 좋아한 음식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시리얼'이었다.

2년 동안 아들은 좋아하는 '시리얼'을 한 번도 안 먹었다. 설탕이 많고, 정제된 가공식품이라서.

노릇하게 구워진 후레이크를 그릇에 조금 담아 본다. 그리고 우유를 붓는다.


한 입 크게 물면, 바삭 거리는 식감이 너무 맘에 든다. 우유의 고소함 속에서 달콤한 과자를 먹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몸에 크게 나쁜 것 같지는 않아서 기분이 좋다. '계란 흰자 3개 분량, 우유와 함께 마시면 완벽한 영양가' -이 광고성 문구가 설령 거짓이어도, 아들은 행복하게 '시리얼'을 먹는다. 문제는 한 번 먹기 시작하면, 조금씩 여러 번 먹으면서 한 봉지를 다 먹는 것이다. 그 후에는 끝없는 자기 학대와 원망의 소리가 나온다.


"다신 안 먹을 거야. 엄마! 내가 시리얼 사 달라고 하면 절대 사 주지 마세요!"


철떡 같이 약속을 했지만, 나는 안다. 어차피 못 지킬 약속임을. 그래서 아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리얼을 사 들이기 시작했다.

'네가 좋아하는 거 여태까지 못 먹었으니 맘껏 먹어라.'  

아몬드 후레이크, 블루베리, 현미, 오레오, 귀리 시리얼 등등. 그렇게 많은 종류의 시리얼이 있는 줄 몰랐다.



"아들, 그렇게 맛있어? 너 다 먹어 봤잖아. 뭐가 제일 맛있어? 엄마 좀 알려 줘."

"음, 제 개인적인 취향은요, 아몬드 후레이크예요. 바삭거리면서 달콤하고, 설탕이 살짝 있는 게 더 맛있고, 아몬드도 있고, 얇게 구워진 후레이크가 일품이죠."



아몬드 후레이크를 먹는 아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2년 만에 처음 본 미소이다.

"아들, 같이 먹자. 엄마도 먹을래."

나는 그날 이후로, 아들과 함께 아몬드 후레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아들의 선택은 탁월했다. 아몬드 후레이크가 1등이었다. 적어도 나와 아들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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