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박물관, 순수한 사람들

by 히다이드

어린 시절부터 역사를 좋아해서 중학생 시절에는 역사 선생님이 꿈이었다. 1, 2차 세계 대전만큼 극적인 사건들로 채워진 역사적 시기도 없어서 그 당시를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들은 언제나 내 호기심을 자극했었는데, 두 차례 세계 대전의 중심에 있던 영국의 수도 런던에 전쟁 박물관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직감적으로 굉장히 흥미로운 것들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 박물관은 템즈강 건너편에 있었다. 트라팔가 광장이나 버킹엄 궁전, 의회 의사당 등의 명소가 전부 강 이쪽 편에 있어서 템즈강을 건널 일이 없었는데, 전쟁 박물관을 가는 날 아침 처음으로 템즈강을 건너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한적한 주택단지에 전쟁박물관이 있었다. 앞마당에 거대한 전함의 함포 두 문이 진열돼 있었는데 그렇게 거대한 포는 처음이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의 승전국이라는 영국인들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박물관 안에는 기대했던 대로 그 당시의 무기와 군인들이 사용하던 물품들이 잘 전시돼 있었다. 당시에 만들어진 선전 영화와 신문들은 마치 내가 2차 대전이 발발한 당시로 돌아간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모병을 위해 만들어진 포스터들이었다. 상의가 벗겨진 채 쓰러져 있는 여자를 피가 떨어지는 총검을 들고 있는 독일군이 짓밟고 서 있는데,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벨기에에서 아이들과 여자들이 죽는 걸 보고도 참고만 있을 건가?’라고 포스터는 묻고 있었다. 멋들어진 콧수염을 가진 장군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브라이튼은 당신을 원하고 있다.’고 말하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영국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 위에 ‘당신의 고향이 여기에 있나? 그러면 그것을 지켜라.’고 하던 포스터도 있었다. 주로 남자라면서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일군의 만행을 보고만 있을 거냐고 묻는 포스터들이 많았다.


독일군이 영국 본토로 진격해 들어온 적은 없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치열한 공중전을 펼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늘에서 벌어진 일이지 독일 육군이 영국 본토에 상륙한 적은 없었다.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참여시키기 위한 논리가 고작 남자인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냐는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남자인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며 전장으로 향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친 숭고한 희생일 수도 있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제국주의 열강의 권력자들이 무료함을 달래려고 탁자에 펼쳐놓은 체스판 안으로 자원해서 들어가 쓰러진 체스 말 중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나에게는 남자인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며 나서는 모습이 그저 순수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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