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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다이드 Nov 03. 2023

124. 이상한 호의

나의 첫 여행, 대륙 횡단

 ‘카일 오브 로할시’에서 인버네스까지 기차를 타고 간다. 원래 '아일 오브 스카이'에 올 때도 인버네스에서 ‘카일 오브 로할시’까지 기차를 타고 오려고 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가 아름답다고 해서 어떻게든 기차 시간을 맞추려고 했는데,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카일 오브 로할시’에서 포트리까지 들어가는 버스 시간에 맞출 수가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오게 된 것인데, 마침내 ‘카일 오브 로할시’에서 인버네스까지 펼쳐지는 기차 밖 풍경을 보게 된 것이다.


 역시나 창밖으로 보이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푸른 들판과 숲, 강의 모습은 여기가 하이랜드가 맞나 싶을 정도였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인버네스에서 ‘카일 오브 로할시’까지 버스를 타고 오며 봤던 풍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부슬비가 내리던 하늘 아래서 본 을씨년스러운 민둥산들과 검은빛의 호수, 오래된 성터와 척박한 들판의 모습이 하이랜드의 본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버네스에서 에든버러로 가기 위해 퍼스(Perth)행 열차로 갈아탔는데, 한 남자와 동행하게 됐다. 인버네스 역에서 내리는데 어떤 백인 남자가 나보고 에든버러까지 가냐고 먼저 물어보더니 자기를 따라오라는 것이다. 턱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뒤로 묶은 2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접이식 자전거를 끌고 있는 걸 보니 '아일 오브 스카이'에서 자전거 하이킹을 하고 집에 가는 것 같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스코틀랜드 끝까지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오면서 열차 환승하는 일은 이제 자신 있었는데 이 남자가 베푸는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아 모르는 척 따라갔다.


 둘이 같이 퍼스 행 기차에 올라타 사이좋게 마주 보고 앉았는데, 나한테 먼저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을 걸었던 남자는 같이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나한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보통 낯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안내해 주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름은 뭐냐, 어느 나라에서 왔냐, 직업은 뭐냐와 같은 기본적인 물음은 던져볼 법한데 이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 배려해서 그런 거라면 고마운 거지만, 집에 가서 친구들에게 오는 길에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대는 어리바리한 동양인 여행자를 만나서 내가 에든버러까지 데리고 왔다고 무용담처럼 얘기하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서로 한 마디도 안 하고 조용히 가고 있는데, 그 친구가 배가 고픈지 샌드위치를 꺼내서 먹기 시작했다. 나도 아침에 포트리의 숙소를 나올 때 호스트가 챙겨준 쿠키가 생각나 가방에서 쿠키를 꺼냈는데, 가는 내내 날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이 그때 처음으로 날 힐끗 쳐다봤다. 짧게 얘기를 주고받았는데 에든버러에 도착할 때까지 그 뒤로 따로 더 얘기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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