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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다이드 Nov 10. 2023

125. 짜증 내다 들키다

나의 첫 여행, 대륙횡단

 열차가 에든버러 역에 접근하자 스피커를 통해 중년의 남자가 약간 느끼한 목소리로 다음 역은 “에딘부러”라고 하는 게 들려왔다. 현지에서 에든버러를 에딘부러라고 발음하는 건 몰랐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고급스러워서 왠지 모르게 기품 있게 느껴졌다.


 늦은 오후에 에든버러 역에 도착했다. 처음 영국에 도착하고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역 플랫폼에 발을 내디딜 때는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던 도시를 직접 보게 되는구나 하는 감격이 있었는데, 에든버러 역의 플랫폼에 내려서면서 느낀 것은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유명하지만 낯선 도시에 대한 설렘이었다. 그래서 바로 역 밖으로 안 나가고 대합실도 둘러보고, 역 주변도 어슬렁거리다 숙소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숙소에 가려면 에든버러 구시가지 중심의 대로를 따라 홀리루드 궁전까지 가야 했다. 에든버러 성과 홀리루드 궁전을 잇는 대로 양옆으로 오래된 주택과 상점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는데,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의 벽을 따라 말끔히 정리된 대로를 걸으며 대영 제국 왕의 행차를 보기 위해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로가 꽤 길었다. 홀리루드 궁전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숙소까지 가려면 좀 더 걸어야 했다. 한 손으로 캐리어 가방을 밀면서 다른 한 손은 휴대폰으로 숙소 위치를 찾았는데 이 날은 이상하게 주소를 찾는 게 어려웠다. 하루 종일 기차를 타고 오느라 피곤해서인지 배낭도 평소보다 무거웠고, 잠시 쉬려고 허리를 숙일 때마다 앞으로 가로질러 멘 크로스백이 유난히 걸리적거렸다. 뭔가가 속에서 끓기 시작하더니 한참을 걸어도 숙소가 나타나지 않자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길 위에서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화를 내다가 다시 휴대폰을 꺼내 지도를 보려는데, 좀 전에 지나친 집 앞에 서있던 여자가 나에게 손짓을 하는 게 보였다. 그 집이 바로 내가 묵게 될 숙소였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짜증 내는 모습을 지켜본 여자는 내가 집에 들어오는 걸 내켜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민망해하며 어색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섰다. 집 안에는 다른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 여자가 진짜 호스트였고 집 앞에 나와 있던 여자는 호스트의 친구였다. 잠시 동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호스트도 문 밖에서 있던 일을 알게 됐다. 호스트가 나를 거실의 식탁으로 데려가 차를 마실 건지 커피를 마실 건지를 물어봤는데, 내가 우물쭈물하며 답을 못하는 사이에 부엌에 있던 호스트의 친구가 호스트에게 뭔가를 얘기했고 그 말을 들은 호스트가 갑자기 나에게 짜증을 내며 뭘 마실 거냐며 다그쳐 묻는 것이다. 첫인상이 이렇게 중요하다. 아마 그 순간 그녀는 손님을 잘못 받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차를 마시겠다고 급히 대답한 후에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지 생각해 봤지만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호스트가 차를 내오고 식탁을 마주 보고 같이 얘기하는 동안 불편했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호스트도 여행을 좋아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에든버러까지 온 나의 여정을 흥미롭게 들어줬고 자기가 갔던 여행 이야기도 해줬다. 호스트의 친구와도 잠깐 얘기를 나눴는데 짧게 머리를 자른 터프한 이미지의 여자였다. 나한테 뭐라고 얘기를 걸었지만 내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제대로 답을 못했는데, 얘기를 많이 하진 못했지만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진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같이 차를 마신 후에 호스트가 나에게 숙소 이용 방법을 안내해 줬는데, 샤워실의 사용법이 특이했다. 샤워실 한구석에 유리창의 물기를 제거할 때 쓰는 긁개가 있었는데, 샤워를 하고 나서 긁개로 샤워실 벽의 물기를 밑으로 쓸어내리라고 직접 시범까지 보여주면서 얘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필요까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며칠 동안 생활하며 그렇게 해보니 화장실 벽에 물기가 있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과 생활할 때는 이것도 지켜야 할 예절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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