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다이드 Nov 15. 2023

126. 에딘부러

 에든버러에 도착하던 날 열차 안내 방송에서 들었던 “에딘부러”라는 고급스러운 발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특별히 “부”를 발음할 때 아주 약간 끌어주면서 톤을 높여야 한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


 에든버러 방문을 준비하면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찾아봤던 장소는 성 자일스 교회였다. 종교개혁 500 주년에 맞춰 종교 개혁과 관련된 역사적인 개신교 교회를 찾아보는 게 여행의 주요 목표였는데,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존 녹스가 활동한 교회가 바로 에든버러의 성 자일스 교회였다.


 에든버러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오전에 에든버러 성까지 걸어가면서 중간에 있는 성 자일스 교회를 방문했다. 중세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건물 안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교회 구석구석에 있던 기도실들이 인상 깊었다. 각 기도실마다 ‘아무개의 기도실’과 같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이름이 붙어있었는데 안에는 해당 인물과 관련한 기념물이 있고 기도를 할 수 있는 의자가 설치돼 있었다.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기리며 기도하는 공간 같았는데, 거기 앉아서 눈을 감으면 몇 백 년 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기도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호흡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어갈 수가 없어 밖에서 지켜보기만 하다 발걸음을 돌렸다.

 교회 안에는 종교 개혁기에 한 여인이 강대상의 주교에게 집어던졌다는 세 발 의자의 모형도 있었다. 처음에는 몇 백 년 동안 전해져 온 보물을 본다는 설렘을 가지고 다가갔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주철로 만든 모형이어서 약간 실망스러웠다. 성가대석에 있는 악보 받침대야말로 몇 백 년은 이어져 내려온 것처럼 보였다. 나무로 만든 고급스러운 받침대였는데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입혀진 손때가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말해 주고 있었다.


 교회에서 나와 에든버러 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언덕을 올라가는 대로의 끝에 이르자 마침내 에든버러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파른 바위산 위에 이중 삼중의 성벽을 쌓아 만든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벌어졌을 치열한 전투들을 상상하며 성 안에 들어섰다. 성은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었다. 넓은 공터 한 켠으로 대포들이 늘어서 있고, 작은 예배당을 비롯해 부속 건물들이 많았는데 그중에 어떤 것들은 지금도 성에 주둔하는 군부대에서 쓰고 있었다.

 오래된 성답게 영국군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도 있었다. 근대 영국군의 상징이던 레드 코트를 입은 군인들의 전투 모습이 담긴 그림들이 많았는데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기병대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말 위에 탄 남자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용맹스러움, 화가는 자랑스러운 대영 제국 기마대의 모습을 담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기병대 밑에서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다른 색  군복의 군인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스코틀랜드 왕실의 왕관과 보검, 홀이 보관돼 있던 방도 기억난다. 유독 이곳에서만큼은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을 정도로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흐르는 장소였지만, 왕실의 보물들이라고 해서 다른 박물관에서 봤던 유물들보다 더 화려한 것은 없었다. 다만 오랜 시간 이어져 내려왔고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의미 깊은 물건들이 가지는 특별한 아우라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에든버러 성 방문을 마치고 저녁에는 밤거리를 산책했다. 에든버러 구시가지는 조명이 굉장히 어두웠다. 어딜 가나 어두침침했는데 어딘가에서 유령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구시가지 곳곳에 유령투어 간판이 보이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조명은 어두웠지만 사람들은 여느 휘황찬란한 밤거리와 다를 바 없이 활기차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엔 음침하다고 느껴서 위축돼 있던 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적응이 되더니, 어느 순간 은은한 조명 아래 운치를 즐기며 구시가지를 걷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125. 짜증 내다 들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