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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다이드 Mar 08. 2024

133. 서포터

나의 첫 여행, 대륙 횡단

 윈더미어에서 묵게 될 숙소는 온통 빨간색이었다. 호스트 할아버지가 한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소속 팀의 열성적인 팬 같았는데, 벽 전체가 붉은 색 경기복 상의와 각종 기념품, 선수들과 찍은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내가 머물게 될 방의 침대보마저 붉은색이었다. 붉은색 침대를 보는 순간 빨간색이 정서적으로 안 좋다는데 매일 빨간색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이 되어 외출했던 호스트가 집에 돌아왔다. 인사를 나누고 같이 얘기를 해보니 역시나 한 축구팀의 서포터로 활동하고 있었다. 자신이 해외에서 열리는 그 팀 경기를 따라가야 해서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 집에 없을 거라고 하는데, 나를 너무 믿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스트가 집에 안 들어오면 오늘은 늦나 보다 하고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무도 없으면 일찍 나갔나 보다 하고 넘어갈 텐데, 굳이 자기가 며칠 동안 이 지역에 없다는 걸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뭐 가져가고 싶은 거 있으면 가져가라는 것인지, 아니면 한눈에 봐도 순해 빠진 놈으로 보이는데 네가 뭘 할 수 있겠냐고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법 없이도 살 내가 뭔가 나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시원시원한 성격의 할아버지였다. 집에 있는 치즈며 빵, 잼 등 필요한 것은 마음대로 쓰라고 하셨다. 벽에 붙어있던 흑백사진을 보니 젊은 시절 공군에서 파일럿으로 복무했던 것 같은데, 서글서글하고 사람들한테 인기도 많았던 한 젊은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 상남자 할아버지에게 약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마늘이었다.


 대화를 하는 중에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 물어보셔서 슈퍼마켓에서 산 샐러드팩을 먹었다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그걸 데우지도 않고 그냥 먹은 거냐고 되물어 보셨다. 그렇다고 하자 어떻게 그걸 데우지도 않고 먹냐고 하면서,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던 샐러드의 비닐 용기를 끄집어내 식탁으로 가지고 오셨다. 나에게 샐러드 용기에 적혀있는 문구를 보여주며 전자레인지에 데워먹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할아버지가 성분표에 적혀 있던 'garlic'이라는 단어를 보더니 질겁을 다. 자기는 마늘을 안 먹는다는 할아버지가 한일월드컵 때문에 한국에 왔다 모르고 마늘을 먹어서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던 얘기하셨는데, 내가 괜히 미안해졌다.


 한창 할아버지와 얘기를 하는데 어떤 남자가 집에 찾아왔다. 이웃에 사는 남자였는데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내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해 땅을 쳐다보며 옆에 있는 호스트에게 뭔가를 말하는데,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영어를 잘 못 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유쾌한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먼저 일어나고 싶었지만 할아버지를 생각해 그 자리에 한참 동안이나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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