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를 당하고 한참 동안 걷다 보니 하늘이 맑게 개었다.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자 윈더미어 호수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파란 하늘 아래 잔잔한 호수와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 맑고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호수 위에 한가로이 떠 있는 보트들을 보고 있자니 사고 때문에 어지럽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햇빛을 즐기려고 나온 사람들 속에 섞여 마을을 걷다, 한 가로수길 아래에서 다시 용기를 내 자전거에 올라탔다. 이번엔 절대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천천히, 천천히 자전거를 몰고, 마을이 나타나면 아예 내려서 걸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호숫가를 돌며 호수 구경, 사람들 구경을 하다 윈더미어 역의 자전거 대여소로 돌아왔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보통 머물게 될 숙소까지 걸어서 이동했지만, 자전거를 타서 피곤하기도 하고 시골에서 길을 잘못 들어 헤매기라도 할까 봐 버스를 타기로 했다. 역 앞에서 호스트가 알려준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지나자 차도 바로 옆에 사이좋게 모여있는 집들이 나타났는데, 그중 한 집이 내가 머물 곳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마당으로 들어서며 여기 모여있는 집 사람들끼리는 굉장히 친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에 들어가 대충 짐을 풀은 후에 가벼운 백팩만 메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오전 내내 호수를 돌아봤는데 또 호수가 보고 싶었다. 호수가 있는 쪽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시간 안에 돌려줘야 하는 자전거도 없었고, 얽매일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냥 천천히 걸었다.
한적한 도로를 따라 걷다, 도로 옆 주택의 마당을 지나 호수로 향하는 산책로에 들어섰다. 울창한 나무숲을 가로지르는 산책로에는 나밖에 없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숲 사이로 난 굽이길을 돌자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선착장이 나타났다. 배도 사람도 없는 조용한 선착장에서 호수를 바라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호수 한가운데를 향하는 부두 끝으로 걸어갔다.이 적막한 호수에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거대한 호수가 자기의 가장 은밀한 모습을 나에게만 특별히 보여주는 것 같아 호수 한가운데에서 한참 동안이나 서 있었다.
호숫가를 따라 역이 있는 마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오며 그냥 지나쳤던 것들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다. 오전에 잠깐 들렀던 요트들이 정박하고 있는 큰 선착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물결치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조용했다. 시끌벅적하던 선착장도 모두 어디론가 가버린 듯했다. 간간이 한적한 호숫가를 거닐며 사진을 찍는 일행만 볼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없으니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모이를 받아먹던 백조와 오리들도 집으로 가 버린 것 같았다. 석양으로 물들어가는 선착장을 거닐다 숙소로발걸음을 돌렸다.
차도를 따라 걷는데 바로 옆으로 돌담이 둘러쳐진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났다. 푸른 풀밭으로 뒤덮여 있는 언덕을 보며, 언덕 위에 올라가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면 환상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로 된 울타리 문이 있어서 혹시라도 잠겨있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붉은빛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푸른 잔디밭에는 뜻밖의 주인공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양들이었다. 온몸에 지저분한 게 덕지덕지 붙어있는 어른들이 아니라, 깨끗한 털을 가진 진짜 어린놈들이었다. 어떤 녀석은 파란색 스프레이가, 어떤 녀석은 빨간색 스프레이가 뿌려져 있었는데, 암컷 수컷을 구별하려고 뿌려놓은 것 같았다. 그 귀여운 녀석들에게 둘러싸여 주변을 빙 둘러보는데, 석양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에서어린양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자꾸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산 너머로 사라지는 해를 지켜보다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는데, 한 어린 소녀가 풀을 뜯는 모습이 보였다. 맛있게 먹는 모습이 귀여워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풀을 뜯던 소녀가 먹던 걸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일부러 다른 곳을 보는 척 잠시 몸을 돌렸는데, 다시 몸을 돌려 보니 소녀는 내 바로 앞까지 와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호기심 가득하고 깨끗한 눈망울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