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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다이드 Jul 08. 2024

136. 그 남자, 샤워하러 들어오다

나의 첫 여행, 대륙 횡단

 윈더미어를 떠나는 날이다. 아침에 식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집 안 곳곳을 둘러보며 호스트가 모아놓은 수집품들을 감상했다. 정말 진정한 팬이었다. 선수들과 찍은 사진들, 정성스레 진열해 놓은 운동복과 기념품들은 그 할아버지가 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대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부인과는 사별하신 것처럼 보였고, 자식들은 결혼해 다른 지역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은퇴한 할아버지에게는 이제 자신이 응원하는 축구팀이 전부였다. 팀의 일정이 할아버지의 일정이었고, 팀이 이루어내는 성취들이 할아버지의 성취였다. 손주들과 함께 찍은 사진 속의 할아버지는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한 사람이 인생을 살며 겪게 되는 즐거운 일, 슬픈 일, 힘들 일들을 모두 거치고, 이제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팀을 응원하며 소소하지만 여유롭게 남은 인생을 즐기는 모습이 부러웠다. 나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었다.


 씻고 짐을 챙기고 있는데, 첫날 저녁에 찾아왔던 남자가 갑자기 집 안에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들어왔던 남자는 방 안에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날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던 남자가 이번엔 당황한 듯 내 눈을 바라보며 해명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집의 샤워실에 문제가 생겨 샤워를 하러 왔다고 얘기하고 있었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호스트 할아버지가 외국으로 원정 응원을 하러 간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집에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남자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혹시 몰라 호스트 할아버지에게 옆집 남자가 당신이 없는 동안에 당신 집에 들어왔었다는 메일을 남겨놓았다.


 씻고 있는 남자를 뒤로 한 채 숙소를 나왔다. 이제 요크로 간다. 한국에서 여행 계획을 짜며 가장 잉글랜드적인 게 무엇인지를 고민할 때 순정만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었다. 랭커스터 가와 요크가의 장미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만화였는데,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미남 귀족 청년의 우수에 찬 눈이 자꾸 떠올랐다. 그 만화의 배경 속에 한 번 가보기로 했는데, 랭커스터 가문이 있던 랭커셔 주는 리버풀에 들를 것이라 따로 가볼 필요가 없을 거 같았고 요크가의 중심지였던 요크를 방문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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