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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다이드 Jun 24. 2024

135. 병풍의 꼭대기에 올라서다

나의 첫 여행, 대륙횡단

 케즈윅 호수 옆 오리와 백조들이 내려앉아 거니는 널따란 잔디 위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며 한참을 머물다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목적지는 그라스미어, 유명한 영국 시인이 살았던 곳이라고 하지만 그 시인과 관련 있는 장소를 찾아갈 계획은 없었다. 전형적인 영국의 시골 모습을 보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오후의 햇빛이 하늘을 노랗게 물들이기 시작할 때 그라스미어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의 지도를 보며 어디로 갈지 잠시 동안 고민했는데, 일단 근처의 산을 향해 걷기로 했다. 산 쪽으로 걷다 보면 꾸며지지 않은 영국 농촌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적한 돌담길을 따라 걷다 작은 시내를 건너자 탁 트인 목초지가 나타났는데, 그 한가운데를 평평한 돌들을 깔아 정성스레 만든 길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정면의 산까지 길이 이어져 있어 그대로 따라 걷기로 했다.


 하얗게 말라버린 양의 똥들이 길을 덮고 있었다. 군데군데 있으면 어떻게든 피해서 걷겠는데, 길 전체를 덮고 있다 보니 발을 내디딜 곳이 없었다. 요리조리 피해서 걸어보다 포기하고 그나마 밟아도 될 정도로 바짝 마른 것들을 골라 밟으며 걸었다. 다행히 산에 가까워질수록 똥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길의 끝까지 가보겠다는 각오로 걸었는데 산의 중턱을 지나자 마침내 길의 끝이 나타났다. 가파른 경사의 절벽이 병풍처럼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삼각형의 꼭대기처럼 뾰족한 봉우리를 가진 산들이었는데, 이런 모양의 산들을 '아일 오브 스카이' 섬에서도 종종 봤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게  뾰족한 꼭대기도대체 뭐가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다. 시계를 보며 따져보니 숙소에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타려면  십분 안에 정상까지 갔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했다. 중간에 시간을 넘겨버릴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한밤중에 숙소까지 걸어가야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무조건 올라가기로 했다.


 결정은 했지만 난감했다. 길이 완전히 끊겨 있었고 경사각 60도 정도바위벽을 올라가야 했는데 잡고 올라갈 만한 게 없었다. 몇 미터 정도 되는 바위벽만 타고 올라가면 그 뒤부터는 수월해 보였는데, 한참 동안 벽 앞에서 서성이다 마침내 길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위험하긴 했지만 손과 발을 짚어가며 간신히 바위벽을 올라갔다.

 정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산등성이 너머로부터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그 과연 뭐가 있을지 기대하며 올라갔는데 끊어진 줄 알았던 길이 다시 나타났다. 이왕이면 버스를 타고 집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경사도 많이 완만해졌고 조금만 더 가면 정상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며 버스를 타기 위해 방향을 돌려야 할 가장 늦은 시간을 계산하며 뛰었는데, 계속 뒤로 미루면서 달리다가 어느 순간 돌아갈 수 있는 선을 지나버렸다는 걸 깨닫게 됐다. 더 이상 계산할 필요가 없었다. 시계를 볼 이유도, 달려야 할 이유도 없어져 저 앞에 보이는 길의 끝만 바라보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경사가 완만해서 금방 꼭대기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길의 끝에 올라설 때마다 다시 새롭게 길이 이어지는 바람에 한참 동안을 걷고 나서야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뾰족한 산의 꼭대기에 오른다고 생각하고 왔지만 꼭대기는 평평했다. 그나마 제일 높아 보이는 곳에 올라서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하늘과 맞닿아 있는 적막한 산에 나 혼자 뿐이었다. 오직 양 한 마리가 풀을 뜯다 예상하지 못한 방문자에 놀랐는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올라온 길의 반대편 중턱에는 파란빛의 아담한 호수가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의 꼭대기를 스쳐가는 바람을 맞으며, 산이 감추고 있던 적막한 호수를 내려다보고, 또 멀리 보이는 마을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려오는 길은 여유로웠다. 어차피 숙소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놓쳤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내려올 필요가 없었다. 가볍게 산책하는 마음으로 숙소가 있는 마을까지 10 킬로미터 정도를 걸을 생각이었다. 언제쯤 숙소에 도착할지 계산하려고 시계를 보는데, 내가 시간을 잘못 계산했다는 걸 알게 됐다. 마지막 버스 도착 시간까지 1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던 길을 달리듯 걸어 내려가 바위벽 앞에 도착했다. 올라오는 것 못지않게 내려가는 것도 난감해 보였지만, 손과 발을 짚으며 조금씩 조금씩 내려가니 그래도 금방 내려갈 수 있었다. 여기부터는 길이 평탄해 달려도 다칠 염려가 없었다. 산중턱부터 달리기 시작해, 양들의 똥밭에 이르자 그제야 한숨을 놓을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버스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조심스레 길을 지나, 시내를 건너 마을로 들어섰다. 원래 조용했지만, 늦은 오후의 마을은 더 조용했다. 정류소 앞 야트막한 돌담에 걸터앉아 간식을 먹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멀리 버스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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