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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다이드 Aug 29. 2024

140. 짜증스러운 오후

나의 첫 여행, 대륙 횡단

  요크에서 다음 목적지인 옥스퍼드로 바로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축구클럽의 경기장인 '안필드'를 보기 위해 리버풀에 잠깐 들르기로 했다. 이 날 잠을 자게 될 옥스퍼드에 저녁 먹기 전까지는 도착하려고 계획을 짰기 때문에 리버풀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리버풀 라임 스트리트 역에서 내리자마자 안필드로 가는 택시를 잡아야 했지만, 나는 앨버트 독을 향해 캐리어 가방을 밀고 가기 시작했다.


  이왕 리버풀에 오기로 했으니 시간이 없더라도 도시를 상징하는 것 하나만 보고 가기고 했는데, 원래 리버풀 하면 비틀즈를 빼놓을 수 없지만 그 흔적들을 찾아볼 시간까지는 없어서 항구 도시 리버풀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곳만 빠르게 둘러보고 안필드에 가기로 했다.


  날이 더웠다. 요크의 햇빛 역시 따가웠지만 요크를 돌아다닐 때는 덥다기보다 화창한 날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캐리어 가방을 밀고 가며 날이 덥다는 게 느껴졌다. 같은 햇빛이었지만 살이 약간 끈적끈적하면서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게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앨버트 독에 도착해 뿌연 하늘 아래 항구를 둘러보다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더위를 식히려고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데, 한 손에 카메라를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아이스크림을 들고 먹다 땅바닥에 카메라를 떨어뜨린 것이다. 카메라 줄이 걸리적거려서 카메라를 든 손으로 어떻게 해 보려는데 손에서 미끄러져 버렸다. 이 카메라로 여행 영상을 찍고 있었는데, 여행 직전에 산 새 카메라인데 떨어뜨리다니, 이걸 어디서 수리한단 말인가, 또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사야 한단 말인가, 항구로 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이 옆을 지나갔는데 혼자 씩씩거리는 나를 이상하게 봤을 것이다.


  다행히 카메라는 이상이 없었다. 바닥이 시멘트 바닥이어서 분명히 LCD 액정이 깨졌을 거라 생각하고 카메라를 집어 들었는데 액정은 금간 것도 하나 없이 멀쩡했다. 액정을 지탱하는 금속 프레임이 약간 휘어 있었지만 쓰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카메라가 멀쩡하다는 걸 확인하자 그제야 흥분이 조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벤치에 앉아서 좀 쉬다가, 항구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후에 다시 리버풀 라임 스트리트 역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역 뒷골목에서 택시를 잡아야 했다. 경기장에 들어가 보려면 문 닫기 전에 빨리 도착해야 하는데 택시가 잘 안 잡혔다. 어렵게 택시를 잡았는데 나 혼자만 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타야 했다. 그중 한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게 됐는데, 내가 리버풀을 좋아하고 '안필드'를 간다고 하니까 굉장히 좋아하셨다. 아주머니도 리버풀의 팬 같아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아주머니가 먼저 택시에서 내리시며 5파운드 정도 되는 내 택시비까지 대신 내주셨다. 아주머니가 내릴 땐 몰랐는데 나중에 내가 내리면서 택시비를 내려고 하니 운전기사분이 말씀하셔서 알게 됐다. 고마웠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외국인일 뿐인데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베푸는 모습이 멋있었다.


  안필드가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해가 이미 제법 많이 기울어 있었다. 정식 경기장 투어 시간은 지난 것 같았지만 기념품 가게는 문을 열었을 수도 있었다. 프리미어 리그 경기가 시작하기 전 중계방송에서 하늘에서 촬영한 안필드 주변의 주택단지를 보여주곤 했는데, 늦지 않게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때 방송에서 봤던 거리를 지나는데도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안필드 앞에서 내렸는데 경기장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어떻게든 주변을 돌아다녀보겠지만 옥스퍼드에 가는 기차를 타려면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원래 안필드를 방문하기 위해 리버풀에 온 것인데 정작 안필드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가야 한다는 게 속상했다. 항구에 괜히 갔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실망감 때문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경기장 앞을 서성이다 멀리서 택시가 오는 걸 발견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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